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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말을 퍼올린다/박하리
남해 이어리 저녁풍경말을 가둔다. 문을 잠그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를 걸어둔다. 그래도 새어 나간다. 연기를 피우고 새어 나간다. 말은 공기와 함께 섞여 나뒹굴다가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태풍을 만들기도 한다. 태풍은 비를 만들고 겨울 내내 푸석하게 쌓여있던 덤불, 그리고 내다 버리려했던 말들을 섞어 강으로 흘려보낸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덤불 속에는 스멀스멀 온갖 말들로 가득하다. 남은 말들이 섞이며 부풀어 오른 말들은 넘쳐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온갖 말들이 뒤엉켜 촘촘한 그물을 만든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장자시 그 서른 셋/박제천
여수항 천상의궤도마다장미밭을일궜네내생애는바람의도포를입었네가다오다장미꽃가지를치는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바람속으로헤매이는내피의물살이여흩날리는장미꽃잎이여.-박제천 시선집 『밀짚모자 영화관』에서박제천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장자시』외.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녹원문학상 수상.사람은 숙명적으로 바람을 가지고 산다. 바람을 가지고 살아야 그나마 의미 없는 인생길을 의미 있게 걸을 수 있다. 특히 세상의 남자들은 바람을 스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남해 이어리 저녁풍경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허공에 태어나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가서 불이 될온몸을 태워서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빛깔이 없어 보이지 않고모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무엇으로 태어나기 위하여선명한 모형을 빚어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가서 불이 되어라.―문효치 시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에서

물속의 극락/장종권
순천만 습지 하늘은 꼭 물속에만 가라앉는다제 높이보다 몇 배나 더 깊이 가라앉는다빛깔도 더 곱게 갈잎도 물빛도 흔들어대며한 번 빠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극락이다장종권본지 발행인. 1985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시집 『함석지붕집 똥개』 외. '미네르바문학상' 등 수상.

답답한 인천에서 만나는 무의도 해상공원
인천은 역시 섬이 있어주어야 겨우 둘러볼 곳이 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본래 인천에는 섬들이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똥바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멍때리면서 바라볼만 한 풍광이 별로 없었던 셈이다. 삭막하고 건조하고 짭짤하기만 한 도시였던 셈이다.무의도에 해변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해서 둘러보았다. 바다로 나가 바다를 만나는 맛도 있지만, 바다쪽에서 바라보는 해변도 새로운 맛을 선사해 준다. 절벽에 텐트를 매달아 설치해놓고 아찔한 기분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참 위험한 재미다.갈매기들도 제집처럼

새 떼/장종권
순천만 습지빈약한 새들은 떼로 뭉쳐다닌다.세상 다 차지한 듯 휘젓고 다닌다.혼자 다니면 지극히 위험하다.잘못 걸리면 뼈도 못추린다.떼로 다니면 하나 사라져도 끄떡없다.내가 사라질 확률도 거의 없게 된다.누가 사라져도 안타까울 턱이 없다.천년 만년 전부터 당연한 일이었다.새 떼가 허공에 살아남기 위해서는항상 적절한 희생양이 필요하다.장종권본지 발행인. 1985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시집 『함석지붕집 똥개』 외. '미네르바문학상' 등 수상.

맹지에서 맹지 보는, 천선자 시
맹지천선자타인의 지번으로 팔과 다리를 묶인 자루형 토지이다. 메아리가 염장된 통조림통을 끌어안고 있는 포대자루이다. 불안만 발효시키고, 있는 무명자루이다. 어둠으로 꾹꾹 밟아 놓은 길이 없는 자루 위에 부드러운 햇살 한 점 물고 온 바람이 실없이 끈 자락을 흔들고 있다. 뽀얀 뺨을 부비며 서성거리는 두려움이 자루 속을 채우면 잘잘하게 접힌 웃음들이 텅 빈 허공을 두드리는 닳아빠진 자루이다. 꿰맨 자리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자루의 곳곳을 타고 기억들이 흘러내린다. 돌돌 말린 슬픔이 별처럼 반짝이는 풀리지 않는 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