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사나이', 인도차이나 야구 아버지, 헐크 이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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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강인규/소설가 기자
이만수 감독은 프로야구 개막전(1982년 3월 27일)에서 MBC청룡 이길환 투수를 상대로 제1호 안타, 제1호 타점, 유종겸 투수를 상대로 제1호 홈런을 기록해 '최초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또한 최초 100호 홈런, 최초 200호 홈런, 최초 250호 홈런을 기록했다. 첫 홈런을 쳤을 당시, 이만수 감독의 홈런 세리머니를 보던 초등학교 학생들이 ‘우와 헐크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헐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헐크파운데이션을 창립하여 야구 재능기부와 후원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라오스를 비롯한 인도차이나에 야구를 전파하면서 인도차이나 야구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은퇴 후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미국으로 가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제대로 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어요. 특히 훈련 및 컨디셔닝 파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식했었죠, 지금 그때의 훈련 방법을 사용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뉴스에 나올 거에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 가서 선진 야구를 경험하고 한국 야구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리고 한국 야구계에서 받은 사랑을 다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구요,
그런데 1997년 은퇴할 때 IMF가 터졌잖아요. 당시 살던 아파트(수성구 범어동 경남타운) 지금 20억 정도하는데, 당시에는 가격이 폭락해서 똥값이 되어 버렸죠. 당시 환율이 1달러에 2,000원 할 때였거든요. 집과 건물 두 채까지 팔아서 미국으로 간 뒤에 야구 공부하는 데 다 썼어요. 하하.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가족분들도 고생하셨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저만 미국에서 생활을 하려고 했죠. 그렇게 혼자 지내다 보니 정말 힘들더라구요. 의지할 곳도 없고……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고…… 사실 제가 언어와 문화장벽에 부딪혀서 우울증 비슷한 것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야구인의 생활도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때 눈앞에 가족이 아른거리더라구요,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미국에 와서 같이 지내자고 연락했습니다. 저였으면 선뜻 미국으로 바로 오지 못할 것 같았는데, 아내는 망설임없이 호응을 해 주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감사하죠. 제 꿈을 이루는 데 아내와 가족의 응원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죠. 이후 2005년 공식 로스터에 정식코치로 등록되어,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시리즈 우승 코치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최초라는 역사를 쓰신 거네요. 야구선수 출신으로는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길을 걷고 계신 것 같아요. 감독님의 인생철학이 특별하신 것 같습니다.
50년 야구인생 동안 받은 사랑을 다시 야구팬들에게 돌려드리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 동안의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경험은 제 야구철학의 전환기였던 것 같아요. 메이저리그의 팬 문화가 충격이었거든요.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자원 봉사가 몸에 배어 있었어요. 거기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야구는 단순히 스포츠가 아니에요. 하나의 문화예요. 제가 스포테인먼트라는 개념을 국내 야구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SK 코치 시절 팬티 세리머니를 했던 이유도 그거에요. 팬과 함께 즐기는 야구. 야구는 선수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팬들도 같이 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 제가 팬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보답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한 고민이 현재 하고 있는 재능기부 일로 이어졌구요. 헐크 파운데이션이라는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입니다. 헐크 파운데이션을 통해 국내의 유소년 선수들과 라오스 현지 선수들을 지원해 주는 등 다양한 야구 사회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재능기부를 하기 위해 1년에 전국 50여 곳을 다닙니다. 고등학교는 3박 4일, 중학교는 2박 3일, 초등학교는 당일이 기본이에요. 고교대회 경기장을 찾아 미래의 포수들을 찾는 일도 빼놓을 수가 없어요. 유소년 캠프뿐만 아니라, 선수들을 위한 강연에도 빠짐없이 나갑니다. 여기에 라오스와 베트남 등 외국에도 나가야 합니다. 그 외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회인 야구단 리커버리 야구단 총재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티볼 활동에는 무엇보다 많은 정성을 쏟고 있어요. 발달장애인 야구단 협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야구가 사회에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아요. 리커버리 야구단과 발달장애인 티볼 등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들을 보면 너무 행복하고 뿌듯합니다.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기 위해 애쓰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2014년 SK 사령탑에서 물러난 뒤에 야구 불모지였던 라오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죠. 현역 감독 시절, SK 와이번스 선수들의 유니폼과 용품들을 모아서 컨테이너 박스에 실어서 보내주었죠. 그것이 첫 시작이 된 것이죠.
감독 생활을 마무리 하고,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위해 동유럽 여행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뜬금없이 '당신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무슨 말인지 당황했어요. 그동안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감독 생활을 끝내면 가장 먼저 동남아에 가서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하더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냐는 거에요. 동유럽 여행은 언제든지 가도 되지만, 동남아 재능 기부는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갑작스럽게 라오스로 가게 된 거에요. 저를 위해 희생해 주고 올바른 길을 이끌어준 아내에게 정말 고마워요. 그 후에 항상 마음에 두고 후원하고 있었던 라오J브라더스 야구단을 직접 찾아갔어요. 2014년 11월 12일이었어요.
거의 10여 년을 이어 오고 계신 거네요. 짧지 않은 기간인데 어려운 점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뜻을 이루고 한국으로 컴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어요. 재능기부 차원이었죠. 부끄러운 얘기로 한번 멋있게 보이고 돌아오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하하.
라오스에서 처음 만난 선수들의 꿈은 세끼 밥을 먹는 것이었어요. 그런 친구들에게 야구는 언감생심이죠. 하지만, 제가 처음 야구를 통해 꿈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그들에게 야구를 통해 꿈과 희망, 미래를 주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아무런 야구 인프라가 없었어요. 제가 보내준 유니폼, 글러브, 공, 그리고 방망이 몇 개가 전부였죠. 우리나라 초등학교 야구부보다도 못한 상황이었어요. 뙤약볕을 피할 곳조차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선수들이 떠나 버려요. 참 암담했죠.
처음 도착했을 때는 선수가 12명뿐이었어요. 당장 테스트를 실시해서 40명을 모집했어요. 그 후 13명이 남았고, 그 후에 다시 15명 정도 더 선발해서 라오J브라더스 선수들은 총 28명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했죠. 신발도 없어서 절반이 맨발이었어요. 무엇보다 먹고 재우는 일이 급선무일 정도였죠.
선수들을 한국에 초대하기도 하셨는데요, 선수들이 좋아했겠어요.
처음에 선수들에게 열심히 하면 한국에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아무도 안 믿어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도움을 받아서 그 약속을 지켰죠. 서울 잠실구장, 부산 사직구장, 인천 문학구장, 수원 KT위즈파크를 둘러보게 했고, 인천서 홈스테이도 했죠. 라오스는 가난하니까 편부모 가정이 많고 조부모 손에 자란 아이도 많거든요. 그들에게 한국의 가족문화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돌아갈 때가 됐는데도, 안 가려는 거에요. 제가 겨우 달랬죠. 너희가 돌아가야 다음에 또 올 수 있다고요. 그때 그 표정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랬던 선수들이 한국에 7번이나 더 왔죠. 그러는 사이에, ‘밥 세끼’가 꿈이라던 생각도 달라졌어요.
한 학생은 정치인이 되겠다고 했어요. 정치를 잘 해서 한국처럼 잘살고 싶대요. 다른 학생은 의사가 되고 싶다더군요. 라오스 사람들은 병원이 없어 자연 치료에 의존해요. 잘사는 사람만이 옆 나라 태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거든요. 어떤 학생은 교사, 어떤 학생은 사업가… 가만히 듣다 보니 좀 괘씸하더라고요. 야구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따져 물었더니, 다행히 2명이 손을 들더라고요. 한국 가서 야구하고 싶다고요.
그때 정말 보람을 느꼈어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야구를 하게 된 게 무엇인지, 무슨 사명처럼 여겨졌어요.
그 선수들을 데리고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셨죠?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최초로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 참가를 했죠. 2022년 항저우 아시안 게임(2023년 9월 개최)에서 첫승을 할 때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났어요. 제가 라오스에 야구의 씨앗을 뿌린 지 10년째에 거둔 1승이었거든요.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도, 프로야구 선수 시절 3관왕과 최고의 기록을 세웠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거든요. 이번에는 정말 눈물을 한없이 쏟았어요. 처음 12명으로 야구를 시작할 때가 떠올랐고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분들과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더라구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면서 1승을 거두면, 대통령궁 앞에서 팬티 세리머니를 하겠다고 했었거든요. 그때는 전패를 하는 바람에 못 했어요. 2023년도에도 사실 크게 기대를 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진짜로 1승을 해 버린 거에요. 문제는 대통령궁에서 그것을 허락해 주느냐는 거에요.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에서 대통령궁 앞에서 상의를 벗고 달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그런데, 라오스 정부가 이례적으로 허가를 해 줬어요. 제 노력과 헌신을 인정받는 것 같아 감사하고 기뻤죠. 다만 속옷이 아닌 마라톤 복장으로 하는 조건이었어요. 대통령궁이 보이는 곳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소리지르면서 한 바퀴를 돌았어요.
최근에는 제가 라오스 대통령 상을 받고, 또 라오스의 교육부 장관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야구장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빌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야구장 4개 정도를 세울 수 있는 면적의 땅을 받았어요. 다만 경기장을 지을 수 있는 금액은 없어서 후원자를 모시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신축야구장이 완공되었고 라오스 선수들을 위한 3톤 트럭 뚝뚝이까지 운행하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빛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지금 이 성공을 발판으로 라오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야구 중심지로서 아시안 대회를 열고 세계대회까지 열게 만드는 것이 제 꿈이에요. 제가 안 되면, 제 후배들이 이뤄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베트남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베트남에 가게 된 것도 무슨 숙명같았어요. 2019년 12월 26일 베트남 하노이에 처음 들어갔죠. 저희 아버지가 월남 참전 용사입니다. 라오스와 베트남 간 국가대항전을 하자고 해서 간 거였어요.
베트남은 현재 박효철 감독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는 미국에서 선진야구를 13년 이상 경험한 훌륭한 분입니다. 베트남은 라오스보다 조금 나았어요. 기존의 베트남 청년들이 하노이와 다낭 그리고 호치민에서 우리나라 사회인 야구처럼 주로 클럽으로 운영되고 있었거든요.
베트남은 젊은 나라에요. 그래서 베트남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희망을 크게 가질 수 있고 미래가 밝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유소년 야구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베트남 야구협회도 발벗고 나서고 있어요. 지난 2022년과 2023년 두 번에 걸쳐 '내셔널컵 야구대회'가 호치민과 하노이에서 열리기도 했죠. 문제는 박효철 감독 혼자로는 역부족이라는 겁니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큰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저와 뜻을 같이하는 후배 야구인들의 도움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 인도차이나반도 5개국에 야구를 전파하는 게 꿈이에요. 라오스는 7년 동안 어느 정도 토대가 닦였어요. 베트남은 앞으로 5~6년은 더 지원을 해야 합니다.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는 이제 시작 단계에요. 저 뒤에는 또 다른 후배가 그 꿈을 반드시 이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야구로 인해 전세계가 화합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야구는 단순 스포츠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하나의 유대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재능기부를 통해서 나는 ‘나’를 넘어서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나의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달려갈 것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재능기부는 화려하지도 않고 아무런 부와 명예도 주어지지 않지만 이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하고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저를 보람차게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통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저는 계속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야구를 통해 받은 사랑을 팬들에게 돌려드리기 위한 마지막 과제이며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배들도 야구를 통해 받은 사랑을 우리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애써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야구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결국 야구선수로서 자신의 삶을 보람되게 하는 것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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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2
조석구 시인님의 댓글
박종부님의 댓글의 댓글
짝짝짝!!!
한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