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을 걷는다
-행간의 부름, 걷기
본문
아버지와 나(스물다섯 살 즈음 일본 여행 중 교토에서)
나의 걷기는 시간을 매우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산길을 헤맸던 기억이 있다. 열 살도 더 전인 것 같은데, 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만나는 알 수 없는 풀 향기는 입안에서도 늘 그리움 비슷한 것으로 씹히곤 했다. 아버지는 내면에 불덩어리를 품고 태어난 어린 딸아이의 성정을 눈치 채셨던 것일까. 당신 또한 조용한 폭풍을 잠재우는 방법으로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걸음을 재촉하셨던 듯하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기억 속의 걸음들은 산책자의 그것처럼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와 말도 섞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길을 오르고 내릴 뿐이었다. 우리는 걷다가 바위에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무더기 앞에서는 그냥 거기서 한 세상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족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아버지를 나는 저절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고독과 좌절과 방황과 두려움과 어리석음과 패배까지도 감각적으로 동의를 하면서 부녀지간을 넘어선 우정 비슷한 감정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나는 걷기를 하면서 삶에 관한 공부를 한 셈이다. 오로지 걷기만을 했을 뿐인데, 조금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 앉으면 내가 안간힘으로 살아내고 싶었던 마을의 풍경이 참으로 아득해지면서, 비현실적으로 물러나버리는 이상한 체험. 소실점을 향해 한 길로 오래 걷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가 매우 단순해져서 오히려 몸이 가벼웠던 경험들. 그런 것들은 내가 계산을 하면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의 단위들조차도 무화시켜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마치 이 모든 것들이 거창한 기억이나 체험처럼 서술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기억 속의 걷기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던 그저 어린 날의 한 장면일 뿐이다. 그렇게 신체가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은 대가처럼 나에게 언어로 돌아와 주었다. 마치 선물처럼 나는 일기를 쓰고 산을 걷고 혼자서 노는 법을 알게 되었다. 걷기의 동지, 내 아버지는 태생적으로 외롭게 태어난 나에게 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산책자의 걷기를 남겨주셨다. 그러니까 나에게 걷기란, 내가 나와 만나거나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자 위대한 유산이기도 하다.
오래 걷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걷다 보면 내 주변의 복잡했던 관계들은 조금씩 물러나 앉으면서 전혀 새로운 감각들로 몸이 채워지는 충만함. 그것은 세상천지의 복화술을 알아듣는 것이랄까, 꽃이나 개구리나 저나 나나 그저 잠시 왔다가 가는 시간의 산책자랄까, 그런 것들이 신체를 깨우면서 언어로 둘러싸이게 되는 삶의 이상한 공식 같은 거. 두 팔 두 다리 털면서 오래 걷기를 하면 어김없이 주위는 배경으로 물러나 앉는다. 그 자리에 또 다른 풍경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버리는 공간의 이동 같은 것들은 낯선 시의 형태로 복원이 되기도 한다. 그런 경험들은 나에게 영혼을 불러내는 행간의 부름으로 몸속 깊숙하게 각인이 된다. 이렇게 걷고 걸으면서 나는 벌써 늙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느리게 걸었던 그 걸음으로 나는 여전히 걷는다. 요즘은 밤의 천변을 혼자 걷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오랜 습관. 강가에 살면 강을 걷고. 산자락에 살면 산을 걷는다. 도깨비를 만나면 도깨비랑 발을 맞추고 그림자 속에서는 모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걷고 걸으면서 몇 번의 이사가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는 밤이 되면 가로등이 요술램프처럼 켜지는 천변이다. 그 밤의 천변을 산책하는 일은 가끔은 죽은 자들과의 만남도 가능해지는 일. 저기 커다란 나무를 반환점으로 왕복 6㎞를 매일 걷다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자연과 한 몸이 된다. 그렇게 바람처럼 벤치에 앉아서 숨을 쉬기도 한다. 몸을 공처럼 궁굴리는 길고양이에게 말을 걸 줄도 안다. 그렇게 나무야, 꽃아, 바람아, 별들아, 하늘아, 오늘도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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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이성필 기자님의 댓글
저는 40대 후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저도 모르게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카메라를 메고 강원도 100번 이상의 한적한 도로를 걷고 싶었던 젊은 날의 심상이 작용한 걸까요. 그렇게 걷기에서 등산으로 주말을 즐기고 있습니다.
약보 식보 행보, 허준은 이미 그 옛날에 알고 있었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저는 여기에 한가지를 주워 추가해봅니다. 약보 식보 행보 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