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속의 씨앗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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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나라. 비 내리면 땅속으로 물길 열리고, 바람에 나뭇잎 한 장 한 장 배를 뒤집는다. 나는 지금 창문 열어 바람을 본다. 고요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한 점 빗방울 뜨는 것도 보이고, 순하게 해가 지는 산등성이도 보인다. 오래 기다려서 둥글어진 무릎처럼 완만하게 굽은 동네 골목에서 세상의 주인처럼 어슬렁거리는 누렁이도 만났다. 아침에 닭 울고 저녁이면 쌀 씻어 앉혀 밥 짓는 마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난생처음 면 소재지에 거처를 하나 마련했다. 대문을 나서면 녹음이 눈 안으로 가득 차는 곳. 하루를 일찍 열고 일찍 닫아서 사람들 모두 자연을 닮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시간에 쫓겨 뛰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나무가 나이테를 천천히 늘려나가듯 해와 달의 부름에 고개 숙이는 땅. 누구네 집일까, 텃밭 고랑에 무더기로 핀 강아지풀도 해아래 싱싱해서 꽃보다 더 꽃 같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란 사람. 서울에서 아이 낳고 여태 살았다. 그러니까 자동차와 빌딩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인공의 미美에 이미 길든 사람. 멀리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길,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마음이 놓이던 사람이었다. 소음과 소음 속에서 내면의 소리도 어느새 소란으로 바뀌면서, 흘러가는 물소리가 심장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고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해 종일 창문 열어 집안을 거풍하는 일은 도시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먼지는 으레 새까만 것이라 일평생 우기고 살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곳의 먼지는 무척 순하다. 독한 먼지가 없으니 독한 말도 독한 인연도 없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 야채처럼 순해서 해종일 문 열어 눈인사로 서로 가까워져도 좋겠다. 서로를 가깝게 믿어서 친구처럼 통한다는 말, 길가 가로수로 서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도 바람결에 암수가 은밀하게 내통해서 반질반질한 은행 알을 맺게 되는 것이라는데. 고요한 나라에 들어와서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사무치는 지금, 할아버지 한 분 빗자루 손에 들고 마을 구석구석을 정리정돈 하신다. 허리 반으로 굽혀서 깨끗하게 비질하신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담뱃값이라도 거둬 드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평생 농사꾼이 이제는 근력이 떨어져서 논 대신 땅이라도 쓸어야 마음이 놓이시는 모양이다. 어디서 왔느냐고 낯선 이방인에게 순하게 건네 오시는 그 천연의 눈길에 왜 갑자기 마음이 텅 비어서 충만해지는 걸까. 텅 비어서 꽉 찬 느낌. 속이 빈 대나무에 바람이 통과할 때 들리는 소리 같은 것. 바람이 가는 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 그 틈새로 바람이 지나갈 때 자명하게 들리는 자연의 말. 그 말을 차근히 받아 적어 내 집 창 앞에 대추가 실하게 익어간다. 이 땅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처럼 뿌리는 땅에 박고, 하늘을 우러러 지금 한창 열매를 익히는 중이겠다. 옆집 아주머니 한 분이 농사지은 것이라며 호박 두 개를 건네주신다. 농약 치지 않아서 조금 못생겼지만, 그래도 맛은 일품이라는데. 나박나박 반달로 정성껏 썰어서 새우젓 넣고 자작자작 지졌다. 호박나물에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마음은 이미 어둠이 걸어 잠근 초부리의 밤을 서성인다. 마을 사람들 모두 잠들었을까. 이제 막 짐 풀어놓고 낮이고 밤이고 마을을 뒤지고 다니는 나는, 대추나무 그늘에 의자 놓고 느긋하게 몸을 앉힌다. 어디선가 빛이 보이고 유성, 내 이마 위에서 별똥별 떨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재빠르게 두 손 합장하고 무슨 소원을 빌었던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서 편안한 지금. 나는 이런 것을 자연이라 부른다. 스스로 그러하여 그곳에 있는 것들. 바람이 땅을 통과하면서 내는 숨결. 그 살아있음의 기운으로 대추나무는 대추를 익히고 감나무는 감을 익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또 사람은 사람의 시간을 편안하게 통과하면 되겠다. 열매는 씨앗 속에 다음 생을 키우고, 사람은 또 사람 속에서 내일의 꿈을 꾸는 이 시간. 귀가 먹먹한 소음 속에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나뭇잎 뒤집히는 소리 이곳에서는 환하게 보인다, 들린다. 조용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정定을 이룰 때 집 앞 개울에서는 쉬지 않고 물 흘러간다. 사람의 발걸음 닿지 못하는 곳까지. 사람의 숨소리 들리지 않는 시간까지. 그리하여 자연은 쉬지 않고 사람의 세상에 피를 돌리는 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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