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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의 숏테이크


오얏꽃 문장이 걸린 찻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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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앗꽃 문장이 걸린 찻집 앞에서
손현숙
 
 
하나의 환영이 지나간 자리에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분명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물리적으로 모습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한눈에 그가 들어왔다. 어느 시절 나와 함께 했던 어떤 얼굴. 크고 실한 자두를 좋아해서 여름을 좋아한다는 그의 입술은 자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 때 더 붉고 싱싱했다. 그시절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었고, 오해와 실망과 환멸이 서로를 사정없이 할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한 장면은 선명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오얏꽃, 이라는 어감이 좋아서 오얏꽃 오얏꽃,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어린 그때, 진짜 자두꽃을 작은 화병에 담아서 불쑥 내밀었던 손. 그때 가만히 웃던 그의 미소가 햇살 속에서 곱게 부서지는 한 장면이 오래도록 가슴에 상흔처럼 남아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도 사랑 하나만을 위해 누군가를 원했던 시절. 미래도 과거도 담보하지 않은 채, 오직 현실 속에서의 한 사람을 향해 발갛게 타올랐던 그때 그 여름이 내게도 있긴 있었나 보다.

 

 구절양장 같은 익선동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어느 해 여름날, 문장이 오얏꽃인 찻집이 골목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찻집 앞에서 오얏꽃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어디서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걸음이 골목을 돌아 나온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저도 나도 스쳐 지나갔는데, 어딘지 익숙한 걸음걸이로 다시 몸을 돌려 골목을 다시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내가 왜 몸을 숨겼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급하게 내 몸을 숨기고 그가 빨리 이 골목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찾는 것인지, 누구를 잃어버렸는지, 그때처럼 입술 다물어서 얌전한 얼굴이 나를 지나 골목, 골목을 기웃거린다.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뒷모습이 내게로 왔다 또 내게서 멀어졌다. 그러기를 몇 번, 저도 오얏꽃 문장을 확인했겠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골목을 빠져 나갔다. 나는 혼자 무엇인가를 도둑질하거나 도둑질당한 사람처럼 오래도록 멍한 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그의 뒷모습은 오래 전의 모습이 아니라 분명 바로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선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사무치는 무엇이었는데 잊었다.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름도 그의 성격도 나와 함께 했던 장면 장면들도 모두 생각이 났는데, 목소리, 그의 목소리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죽음이 몸 안에 들기 시작하면서 가장 나중까지 살아있다는 청각에서 나는 그의 소리를 지워버린 것이다. 그해 여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짓말처럼 그때 그 시절 사건도 목소리도 지워진 채 하얀 오얏꽃이 아른거리는 오늘, 한 여름날의 나들이 속에서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그를 만났다. 이게 만나긴 만난 걸까? 오얏꽃 문장이 걸린 찻집 앞에서의 일이다.
 

우연히 당신을 만났다
손현숙
 
 
문장이 걸린 찻집 앞에서 오얏꽃을 검색하는데 자두가 튀어나온다 자두를 패버리고 오얏을 심어도 하얗게 한 입 베어 물린 이빨 자국 목젖을 타고 내린다
 
누구를 지독하게 기다려본 적 없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여름날 이상한 중력 속으로 오얏꽃, 오얏꽃 어디서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걸음이 골목을 돌아나온다
 
붉고 실한 자두를 한 바가지 들고 와서 주먹처럼 내밀었던 한 장면, 목소리는 지워지고 입술은 자꾸 풍경 너머 눈빛에게 물어나 볼까, 나는 참 멀리도 왔나 보다 

 

 입술 다물어서 얌전한 얼굴이 나를 지나 골목, 골목을 기웃거린다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뒷모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 당신은 나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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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이성필 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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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날, 이 말은 언제 입술에 올려도 아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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