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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외국인 선교사만도 못한 한글정신

-사진:고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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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면 우리 국어와 관련이 있는 특별한 선교사 한 사람이 묻혀 있다.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며 교육자이다. 그는 1886년 조선에 입국해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개인교사를 두고  한글을 배우며 3년 만에 상당한 한글 실력을 갖추었고, 1889년 한글 최초의 지리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해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 서문에는 당시 지배층이 한글 대신 어려운 한자 사용을 고수하는 관행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주시경과 함께 국문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받아 한국을 방문했으나 일주일 후 병사하여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된 것이다. 2014년에 그에게 한글학자이자 역사연구가로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참조) 


띄어쓰기는 글쓰기에서 글을 쓸 때 어절마다 사이를 띄어 쓰는 것을 가리킨다. 보통 공백을 사용하여 띄어 쓰는 것을 지칭하는 것을 의미하고 넓은 의미로는 구두점 등으로 분할한 것까지 띄어쓰기에 포함한다. 한글은 창제시기부터 근대까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한글 최초 띄어쓰기 적용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국교회(장로교)의 선교사 존 로스가 1877년 편찬한 『한국어 첫걸음』이라는 학습교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 범위에서만 활용되고 대중화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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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띄어쓰기 도입을 최초로 창안한 인물이 기존의 헐버트 박사나 로스 선교사가 아닌 윤치호라는 주장이 교계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는 쉼표나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를 분리하면 실수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으며, 그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초창기 한국 선교사들이 집필한 한글책 때문으로 추정된다. 윤치호 이전에 띄어쓰기를 일부 인용했던 로스 선교사 등을 ‘한글 띄어쓰기’ 실험자로 본다면, 윤치호는 첫 도입자이고, 그가 제작에 참여한 ‘독립신문’은 시행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1897년 아펜젤러가 창간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언더우드가 편집한 <그리스도신문>이 띄어쓰기를 수용했다면서 결국 기독교인들이 한글 확산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한글 대중화와 발전에 평생을 바친 주시경 선생의 노력이 띄어쓰기 보편화에 기여했다는 논리도 있다. 선생이 주도해 본격적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한 <독립신문>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1933년에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으로 띄어쓰기가 우리말 표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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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는 라틴어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라틴어에도 띄어쓰기가 없었으나 아일랜드의 수사들이 학습을 위해 띄어쓰기를 도입하였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한중일 세 나라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현대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여전히 띄어쓰기를 하지 않으며, 현대 한국어만이 띄어쓰기를 한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띄어쓰기를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어의 조사가 없는 영어는 구조상 띄어쓰기를 해야만 의미가 분명하지만, 조사가 발달한 한국어는 읽는 입장에서 혼란의 여지만 없다면 원칙을 지키지 않더라도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다. 실제 출판물에서도 띄어쓰기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는 일은 드문 편이고, 허용 범위 내에서 띄어쓰기를 하고 출판을 한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없는 실정이다.


서양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에 감명을 받은 걸로 보인다. 로스 선교사는 자음과 모음만 배우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글자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한 인물이다. 한글에 대한 이런 관심과 연구가 한글 표기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한글은 조선의 문화와 언어적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였다. 한글이 일제의 탄압에도 살아남아 매년 한글날을 기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국적과 민족을 넘어선 한글에 대한 관심과 연구,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띄어쓰기는 가독성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글은 읽는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이다. 내 자랑이 아니었다.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띄어쓰기나 문장부호가 사용되면서 오늘날의 문법규정에까지 이르렀다. 규정은 법이 아니니까 지키지 않아도 누가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연히 읽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읽어가면서 문장의 의미를 파헤치고 공부하고 배우려는 사람이 이 시대에 과연 존재할까.


조선시대를 통털어 당대 일반적인 지식인들은 당연히 한자를 사용하였으며 한글은 언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난 후 한글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턱이 없는 일이다. 일반 백성들이나 사용하는 한글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일반백성에 접근해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몫이었을 법도 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선교사들이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한글은 그나마 숨을 쉬면서 한 뼘씩 자라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라를 잃고 나니 나라 생각은 서서이 간절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서서히 한글에 대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지만 이미 나라는 사라지고 지식인도 저 살기에 급급한 시절로 변해 버렸다.


지식인들이 모른 척하여 발전이 없던 한글이 일제강점기에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다가 1945년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기지개를 켜게 된 셈이다. 대한민국의 지식인도 이제 당연히 국어로 인식한 한글이 제대로 성장한 시기는 겨우 8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그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한글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는 모양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한글을 더 아름답고 더 윤기 나는 국어로 가꾸자는 생각보다 제 잘난 장난기와 아리송한 문장과 문법으로 한글의 모양새를 어지럽게 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돌아보자. 게다가 시적 허용이니 무어니 하는 제 딴엔 고급발상으로 읽는 사람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세종께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쉬이 쓰고 이해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드셨다. 이제 잘난 지식인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어떻게 하면 더 어렵게 문장을 끌고갈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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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더 고급화된 지식인이 되면 어떤 세상이 올까. 이 땅에 지식인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그것은 보통사람들을 옳고 바른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식인이 더 고급화되어 보았자 사실은 쓸 데가 없다. 지금 시대에는 그들을 누가 존경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몽땅 헛짓거리인 셈이 아닐까. 민족의 앞날은 지식인들이 몸 바치고 정신을 받쳐야 빛이 보이지 않을까. 선교사들이 아까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일반 백성들에게 접근하여 도우려 했던 애틋한 정신을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전혀 모른 척하는 듯하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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