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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우리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시의 리듬과 새로운 예술장르의 탄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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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근대역사박물관 뜰

 

장종권 | 시인·본지 발행인


시는 악기가 없는 음악이다. 시는 반주가 없는 음악이다. 음악에는 박자가 있고 리듬이 있다. 그 박자와 리듬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음악적 질서이며, 그것을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현대시는 과연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우리 자유시는 출발부터 충분한 음악적 토대를 확보하지 못했다. 정형시의 외재율을 벗어났지만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리듬의 원리를 확립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이른바 '내재율'이다. 내재율이라는 이름 아래 시의 음악성이 설명되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박자와 리듬을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음악의 외부적 리듬에 반응한다. 소리의 반복과 변화, 강약과 장단이 감각을 움직이고 정서를 일으킨다. 그런데 마음속의 정서적 움직임 자체가 곧 시의 리듬이라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서가 리듬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정서 자체가 리듬은 아니다.

 

우리 시가 내재율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해 온 음악성은 때로 살아 있는 심장의 박동이라기보다 소멸 직전의 희미한 숨소리에 가까웠다. 그 결과 우리 시는 생명의 환희와 희망보다 절망과 후회, 절체절명의 사유와 주장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은 아닌가. 이것은 개별 작품의 우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대시가 걸어온 방향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 자유시는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자식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불행한 자식인지도 모른다. 우리 고유의 노래와 운율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한 채 외래의 형식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출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부모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태어난 자식을 우리의 자식으로 제대로 키우는 일이다. 아직 우리 시의 갈 길은 멀다. 우리 시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그만둘 때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혀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고 있다. 사진과 시를 결합한 새로운 예술작업이다. 서로 다른 예술이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는 일은 언제나 환영할 만하다. 미술과 음악이 만나고, 사진과 시가 결합하여 이전에 없던 예술장르를 탄생시킨다면 박수를 보낼 일이다. 예술은 고정된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예술의 절반과 절반을 합하면 완전한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가. 사진작업도 완벽할 필요가 없고 시작업도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설명하기보다 예술적 완성도의 기준을 낮추는 선언이 될 위험이 있다.

 

사진과 시가 결합한다고 해서 저절로 새로운 예술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시는 시대로 치열한 예술적 탐구를 요구한다. 두 예술이 만날 때에는 단순한 병치를 넘어 서로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는 새로운 미학이 필요하다. 절반의 완성도가 모여 하나의 완성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새로운 예술적 시도에는 언제나 시행착오가 따른다. 기존의 관습을 벗어나는 실험을 처음부터 완성된 이론으로 재단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새로운 장르를 주장한다면 그 장르만의 예술적 원리와 평가 기준을 세우려는 노력 역시 뒤따라야 한다.

 

기술문명의 발전은 예술의 제작 환경까지 빠르게 바꾸고 있다. 복잡한 작업은 간편해지고 서로 다른 표현 매체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제작이 쉬워졌다고 예술까지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노동을 줄여줄 수 있지만 예술가의 사유와 감각, 치열한 창작의 과정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문학잡지의 현실적인 제작 여건도 생각해야 한다. 사진 중심의 새로운 장르를 수용하려면 지면 구성과 컬러 인쇄 등 제작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인에게 사진예술의 이해와 역량까지 요구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시의 언어와 형식을 갈고닦아 온 창작의 태도를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새로운 장르가 기존 시문학의 부족함을 손쉽게 메우는 대안으로 등장해서는 곤란하다. 시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진이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사진과 시의 결합은 기존 시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 자체의 독립적인 미학을 지닌 새로운 예술로 발전해야 한다.

 

계간 『리토피아』는 살아 꿈틀거리는 예술작업을 지지한다. 서로 다른 예술의 만남을 환영하며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도 박수를 보낸다. 다만 그것을 기존 시문학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새로운 예술장르의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새로운 예술은 기존 예술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예술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 한다.

 

우리 시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잃어버린 노래를 되찾고, 살아 있는 박자와 리듬을 회복하며, 우리 언어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야 한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환영하는 일과 우리 시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은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새로운 장르에도 치열한 예술작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치열한 질문이 남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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