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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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악기가 없는 음악이다. 시는 반주가 없는 음악이다. 음악에는 박자가 있고 리듬이 있다. 이 박자와 리듬이 원칙을 벗어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시에는 사실 그럴만한 시간과 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시에는 아직 박자도 없고 리듬도 없다. 내재율이라는 황당한 이름을 가진 극소량의 상징적 리듬이 마치 박자와 리듬인 것처럼 세상을 현혹했다.
사람은 음악 연주처럼 밖의 리듬에 마음이 반응한다. 마음의 작용에 반응하여 시가 연주소리처럼 리듬이 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 상징적 리듬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호흡이라기보다는 거의 죽어가는 상황에서 들릴락말락 내뱉는 마지막 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시는 죽음 직전의 마지막 노래나 진 배 없는 후회와 절체절명의 사유와 주장으로 가득하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가깝다. 살아있는 심장의 강력한 박동이 아니라 박동을 억누르며 소멸시키려는 압박이다.
우리시는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자식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불행한 자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는 어머니가 있든 없든, 아버지가 있든 없든, 반드시 우리 자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시간 앞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우리에겐 시의 갈 길이 남아있다. 아직 우리시가 무엇인지, 우리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그만둘 때가 아니다.
이런 와중에 전혀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얼굴도 어머니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그래서 차라리 그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구인지 묻고 싶지 않다. 새로운 얼굴이 이미 구체적인 얼굴로 다가선 판국에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상관일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각기 다른 예술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동시에 경계를 허물면서 서로에게 인접예술로서의 긍정적인 소통과 협조를 유지하며 서로의 예술작업을 유지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 서로 다른 예술들이 혼합되어 전혀 색다른 예술장르를 탄생시키려는 작업이 분주하다. 세상에는 답이 없다. 세상에는 원칙도 없다. 그러니 어떤 예술작업이 진행되어 어떤 새로운 예술장르가 탄생한다 하더라도 사실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미술과 음악이 서로 뒤섞여 전혀 색다른 예술장르가 탄생된다고 무슨 문제가 되랴. 박수를 칠 일이다. 예를 들어 사진과 시가 서로 뒤섞여 한 몸이 되어 전혀 색다른 예술장르가 탄생이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지극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과거는 삭아서 부서지기 마련이고 미래는 언제든 예측을 벗어나 강력한 힘으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전혀 이질적이거나 신비로운 일은 아니다.
이 작업에 열화와 같은 성원도 존재한다. 왜일까. 그동안의 지지부진함과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 시의 예술작업에 기가 막힌 활로가 뚫린 것일까. 아니면 기껏해야 시의 예술적 작업에 환멸을 느낀 대다수의 시 애호가들이 반란군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소문에는 사진작업에도 완벽한 작업이 필요하지 않고, 시작업에도 완벽한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이해하기 힘든 선언과 함께 밀려드는 이 파도,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서로 다른 예술의 절반의 작업과 절반의 작업이 합해지면 완벽한 하나의 예술로의 탄생이 가능할까. 이 논리는 사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논리로 보일 수 있다. 어쩌면 죽도 밥도 아닌 상황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대중가요 가수들의 피나는 노력은 그들의 것이고, 시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뜻일까. 그래도 어떤 새로움을 위해 무슨 작업을 하는 것이라면 어쨌거나 기대는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면서 단순화를 추구하는 모습도 있어 보인다. 과학과 기술문명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 가지만 인간의 작업을 대체해줄 수 있는 놀라운 기술문명이 등장하자마자 이제 인간은 일찌감치 불필요하고 난해한 작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와 사진이 뛰어난 감성과 특별한 기교로 새로운 예술장르를 열어간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이전에 추구해 왔던 우리의 진정한 시예술과는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환영한다. 새로운 얼굴이니까, 따르는 인파도 적지않아 보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 새로운 얼굴을 문학판의 새로운 얼굴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섣부르다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존재한다. 첫째는 열악한 문학잡지가 칼라인쇄로 바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고, 또하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별도의 예술인 사진예술까지 섭렵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장르가 그동안 치열하게 시작업을 해온 사람들에게는 일면 한꺼번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이다. 시는 갈고 닦는 것이라는 기존 습작태도가 어쩌면 일거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새로운 예술장르에도 예술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이론의 확립이 시급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계간 '리토피아'는 살아 꿈틀거리는 예술작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예술장르 작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 시문학의 다른 모습으로라기보다는 새로운 장르의 개발로 바라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 박수를 보내며 이곳에도 치열한 예술작업이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리토피아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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