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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칼럼-고려궁지에 갔더니 고려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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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본지 발행인)

 

고려의 궁궐터에서 만난 조선의 관아, 그리고 사라진 역사의 흔적

 

강화도에 갈 때마다 궁금했던 곳이 있다. 바로 '고려궁지(高麗宮址)'다. 고려궁지란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터라는 뜻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려시대 왕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 보면 사정이 다르다.

 

얼마 전 다시 고려궁지를 방문했다. 예전에 느꼈던 의문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려시대 왕궁의 모습이나 흔적을 보여주는 건축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부분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의 흔적이었다. 동헌과 이방청이 있고,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었다. 

 

고려궁지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정작 만나게 되는 것은 조선의 관아와 왕실 시설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고려궁지인가, 강화유수부인가. 고려의 왕궁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건물 몇 채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유적에 붙여진 이름이 그 장소의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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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궁은 실제로 존재했다

 

고려는 1231년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이듬해인 1232년, 최우가 이끄는 무신정권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몽골군의 강력한 기마병을 피하고 왕실과 조정을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고려 조정은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약 38년 동안 강화도에 머물렀다. 시작과 끝의 연도를 모두 세어 39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최우는 군대를 동원해 강화도에 궁궐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이후 개경의 궁궐과 비슷한 체제를 갖추려 했다. 궁궐의 뒷산을 송악이라 부르고, 궁궐의 정문에는 승평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강화도에는 정궁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행궁과 이궁 등 여러 궁궐 시설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강화도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고려의 왕실과 중앙정부가 머무는 임시 수도였다. (승평문이라는 현판이 왜 다시 여기에 붙어 있는지, 그 이름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의도였는지, 당시의 백성들과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었는지, 두고두고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고려궁지라는 명칭이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고려의 궁궐이 강화도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다만 오늘날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가 당시 정궁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를 얼마나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할 문제다. 관련 연구와 국가유산 설명에서도 현재의 고려궁지 일대를 정궁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궁은 왜 사라졌을까

 

궁금한 것은 고려 궁궐이 사라진 이유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건물이 낡아 무너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강화도 고려 궁궐의 소멸에는 분명한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1270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는 과정에서 강화도의 궁궐은 몽골의 압력으로 철거되었다. 강화군의 공식 문화관광 자료와 국가유산청의 설명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고려궁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진 건축물이 아니었다. 몽골과 고려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바뀌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철거된 궁궐이었다. 몽골의 입장에서 강화도는 오랫동안 고려의 항전을 가능하게 했던 군사적 거점이었다. 강화해협은 몽골군의 기마 전력을 제한했고, 고려 조정은 그곳에서 왕실과 국가기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몽골은 고려가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벌이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화도의 궁궐과 성곽을 없애는 일은 이러한 재항전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궁궐 철거에는 군사적 목적만 있었을까. 여기에서 고려 내부의 정치적 변화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신정권의 흔적도 지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강화천도를 결정한 사람은 당시 고려의 실권자 최우였다. 고려의 국왕은 존재했지만 실제 권력은 최씨 무신정권이 행사하고 있었다. 강화도는 고려 왕실의 피난처였지만 동시에 최씨 무신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1258년 최씨 무신정권은 무너졌다. 1259년에는 몽골과의 강화가 이루어졌고, 1270년에는 마침내 개경 환도가 단행되었다. 물론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고 무신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환도에 반대한 삼별초의 봉기는 그러한 갈등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강화도 궁궐의 철거는 단순히 몽골의 군사적 요구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고려 내부에서 무신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해체하는 과정과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천도를 통해 구축한 권력의 중심지가 무너지고, 국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그 공간을 지탱하던 궁궐과 방어시설까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무신정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의도적인 역사 말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현재 확인되는 자료에서 궁궐 철거의 직접적인 배경은 몽골의 압력과 개경 환도다. 무신정권의 기억을 없애라는 별도의 명령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적 권력의 교체와 궁궐 철거가 같은 역사적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건축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권력이 머물렀던 장소이며, 권력이 자신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궁궐을 없앤다는 것은 그 공간이 수행하던 정치적 기능을 끝내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화도 고려궁의 철거는 고려와 몽골의 관계뿐 아니라 고려 내부의 권력 변화를 함께 살펴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고려궁터에 들어선 조선의 강화부

 

고려의 궁궐이 사라진 뒤 강화도는 또 다른 역사를 맞이했다. 조선시대에도 강화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양과 가까우면서도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국가적 위기 때 왕실이 피난할 수 있는 장소로 여겨졌다.

 

인조 때에는 옛 고려 궁궐터에 행궁이 조성되었다. 이후 강화유수부의 관아와 왕실 관련 시설들이 들어섰다. 오늘날 고려궁지에서 볼 수 있는 동헌은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곳이다. 이방청은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던 건물이다.

 

외규장각은 정조 때인 1782년에 설치된 왕실 도서 보관시설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2003년에 복원되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외규장각은 조선 왕실의 기록문화와 병인양요의 역사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장소다. 강화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역시 조선시대 지방 행정과 군사체제를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자료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조선시대의 유적들이 고려궁지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놓여 있다. 이 점이 아쉽다. 고려의 궁궐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방문객이 보고 있는 건물들이 어떤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무슨 역할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름은 고려궁지인데 눈앞의 역사는 조선이다

 

강화 고려궁지는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도 공식 명칭은 '강화 고려궁지'다. 문화유산의 명칭이 반드시 현존하는 건축물의 시대만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건물이 모두 사라졌더라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궁궐터라면 그 이름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궁지라는 명칭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 이름만으로는 방문객이 현장에서 만나는 역사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고려궁지에 들어선 사람은 고려의 왕궁을 기대한다. 최소한 고려 왕궁의 흔적이라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을 만나고, 복원된 외규장각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안내의 중심에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강화군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고려 궁궐이 몽골의 압력으로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조선시대 유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 있다. 그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홈페이지에 설명이 있다는 것과 현장을 찾은 방문객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안내받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명칭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강화 고려궁지'라는 공식 명칭을 유지하되, 관람 안내에서는 '강화유수부 유적'이라는 성격을 함께 드러내자는 것이다.

 

가령 주요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강화 고려궁지—고려 궁궐터와 조선 강화유수부 유적’ 그리고 그 아래에 간결한 설명을 덧붙이면 된다. 이곳은 1232년 강화천도 이후 고려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고려 궁궐은 1270년 개경 환도 과정에서 몽골의 압력으로 철거되었다. 현재 관람할 수 있는 주요 건축물은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복원된 외규장각이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방문객이 느끼는 의문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더 나아가 고려시대 궁궐의 추정 배치도와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의 건물 배치를 서로 다른 색으로 구분해 보여준다면 좋겠다. 실제로 남아 있는 건축물과 복원한 건축물, 기록에만 전하는 건축물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그것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일이다.

 

유적은 남아 있는 것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문화유산을 찾아갈 때 흔히 오래된 건물을 보려고 한다. 기와지붕과 기둥, 돌계단과 성벽을 보면서 옛사람들의 삶을 상상한다. 그러나 어떤 유적에서는 남아 있는 것보다 사라진 것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화 고려궁지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고려의 왕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가 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는지, 무신정권은 그곳에서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몽골은 왜 그 궁궐을 철거하도록 압박했는지 묻는다면 보이지 않는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고려의 왕궁이 사라진 자리에는 조선의 관아가 들어섰다. 그 관아와 왕실 시설들 역시 전쟁과 침략을 겪었다.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불탔고,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기록물들은 약탈되었다. 하나의 장소에 고려의 대몽항쟁과 조선의 군사행정, 병인양요와 기록문화의 수난이 겹쳐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처럼 여러 시대가 중첩된 장소라는 사실이 강화 고려궁지의 특별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고려의 궁궐만 있었던 곳도 아니고, 조선의 관아만 있었던 곳도 아니다. 고려의 정치적 위기와 조선의 국가적 위기가 서로 다른 시대에 같은 장소를 거쳐 갔다. 그렇다면 그 모든 역사를 함께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역사는 이름보다 정확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고려궁지를 다시 찾아갔다가 고려궁을 만나지 못한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갖게 되었다. 고려의 궁궐은 왜 사라졌을까.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을 철거한 고려 조정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그 철거에는 무신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없애려는 고려 내부의 이해관계도 작용했을까.

 

그리고 그 뒤에 들어선 조선의 강화유수부는 왜 고려궁지라는 이름 뒤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 이 질문들에 모두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지만, 일부는 앞으로 사료와 발굴 성과를 통해 검토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유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확인된 사실이고 무엇이 추정인지 알려주는 일은 지금도 가능하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이름을 오래 유지한다고 해서 저절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고 풍부하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더욱 깊어진다. 강화군이 고려궁지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는 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이름 아래 숨어 있는 조선시대 강화부의 역사도 함께 드러내 주었으면 한다.

 

고려의 궁궐이 없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고, 조선의 관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이유도 없다. 사라진 고려의 궁궐은 사라진 대로, 남아 있는 조선의 건축물은 남아 있는 대로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고려궁지에 갔더니 고려궁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의 궁궐이 사라진 이유와 조선의 관아가 들어선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때, 비로소 그 장소의 역사가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나는 강화 고려궁지가 이제 고려의 궁궐터라는 이름을 넘어,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함께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오늘 그곳을 다시 찾아간 한 방문객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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