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알사탕’이다, 안다는 것은 착각한다는 말이 아닐까
-―진실과 판단, 그리고 인간의 오만에 대하여(사진 : 정치산, 위봉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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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 시인·본지 발행인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내 생각이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 오히려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세상일에는 아무리 내가 옳다고 주장해도 반드시 그에 대한 반론이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정답이라고 우겨보아도 그것이 실제로 정답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정답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정답으로 인정받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은 갈수록 우격다짐 일색이다. 말이 되거나 말거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구조로 바뀌어 가는 듯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따지는 일보다 누가 더 강하게 주장하는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부터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믿고, 다른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과연 진실이란 존재하는가. 어쩌면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온전히 알아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틀릴 수도 있다. 내 생각이 맞아 보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얼마든지 맞아 보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타인의 생각에 함부로 끼어드는 일도 위험하고, 다른 사람이 내 생각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는 일도 위험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위험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남의 생각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고쳐주려 한다. 정작 자기 생각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비정상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인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진실로 밥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진실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더 좋아한다. 진실을 찾는다고 떠들면서도 정작 진실이 자신의 이익과 충돌하면 슬그머니 외면한다. 없는 진실까지 들먹이며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진실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오면 그 진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진실이란 어쩌면 어린아이를 달래거나 현혹시키기 위해 건네는 알사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달콤한 이름으로 사람을 유혹하지만 정작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혹자는 시인들이 세상과 인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부단히 탐구하며 시를 쓴다고 한다. 지나가던 소가 들으면 박장대소할 일이다. 시인이 세상의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가.
물론 시인이 진실을 탐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진실을 탐구하는 일과 진실을 소유했다고 믿는 일은 전혀 다르다. 시가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는 있어도 시인의 언어가 곧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얼굴은 착각으로 도배되어 있다. 세상의 속마음 또한 끊임없이 변한다. 어제의 확신이 오늘의 의혹이 되고, 오늘의 진실이 내일의 오류로 드러나기도 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그 믿음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제법 잘 돌아간다. 수백 년, 수천 년을 그렇게 굴러왔고 앞으로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왜 이러느냐고 세상에 묻지 말자. 사람들이 왜 이러느냐고 사람들에게 묻지 말자. 세상도 세상을 잘 모르고 사람도 사람을 잘 모른다. 우리 모두가 의혹투성이의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믿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에는 그 앎이 지금 이 순간의 판단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내 눈과 내 지식과 내 상식으로는 당장 그렇게밖에 판단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답이거나 진실인 것은 아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몰랐음을 깨닫고 남몰래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그렇게 확신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뒤늦게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돌이킬 수 없는 판단을 내린 뒤일지도 모른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그 앎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으로 내린 잠정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앎은 무엇인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 확신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의심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인간은 아는 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안다고 믿는 만큼 세상을 오해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과연 누가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다’는 것은 어쩌면 ‘착각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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