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는 사기다, 한국시를 죽이고 다시 시작하자
―한국 자유시의 위기와 자율형식의 새로운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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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 시인·본지 발행인
대중가요 가수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부를 노래를 수백 번씩 연습한다고 한다. 아무리 익숙한 노래라도 끊임없이 연습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몇 달, 몇 년을 보내기도 한다. 무용수들은 짧은 공연을 위해 수없이 몸을 단련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인들은 시 한 편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는가. 시선(詩仙) 이태백의 일필휘지(一筆揮之)를 흉내라도 내듯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는 일은 없는가. 원고청탁을 받고서야 작품을 준비한다는 시인들도 있다. 물론 모든 시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우리 시단에 은연중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읽어줄 독자를 위해 얼마나 고민하는가. 자신의 심오한 사유를 드러내는 데 몰두한 나머지 정작 독자가 시를 어떻게 읽고 느끼는지는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시의 침체는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찾아온 자연스러운 하강인가. 불행하게도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우리 자유시는 충분한 전성기를 누리기도 전에 스스로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말로 이루어진 시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향가와 고려가요, 악장과 가사, 시조에 이르기까지 오랜 노래와 운율의 전통이 존재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형성된 한국 자유시는 이러한 전통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한 채 서구의 새로운 시 형식을 받아들였다. 자유시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무엇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백여 년이 흘렀다. 한국 자유시는 과연 자신의 형식과 리듬을 확립했는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오늘날 우리 시의 근본적인 문제다.
한국시가 죽어간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젊은 독자가 줄어들고 시단은 고령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시대의 변화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젊은 세대가 시를 외면한다면 그들이 왜 시를 읽어야 하는지 설득하지 못한 시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시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시는 왜 읽어야 하는가. 시는 다른 문학이나 예술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서 시의 위기만을 외치는 것은 무책임하다.
시의 본질에는 언어의 형식과 리듬이 있다. 시는 단순히 사유를 기록하는 문장이 아니다. 언어의 반복과 변화, 소리의 강약과 장단, 호흡과 휴지, 행과 연의 조직을 통해 고유한 음악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그러나 한국 자유시는 정형률을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형식의 원리를 충분히 세우지 못했다. 자유를 무형식으로 오해하고, 내재율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리듬의 문제를 설명해 온 것은 아닌가.
자유시는 형식이 없는 시가 아니라 시인이 스스로 형식을 창조하는 시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자율형식론의 출발점이다. 자율형식은 아무렇게나 행을 나누고 문장을 배열하는 자유가 아니다. 작품의 언어와 정서, 의미와 호흡에 따라 시인이 독자적인 형식과 리듬을 설계하고 완성하는 창작의 원리다.
한 행으로 이루어진 시도 가능하고 여러 연으로 이루어진 시도 가능하다. 문장부호를 사용할 수도 있고 생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선택에도 작품 내부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형식은 시인이 임의로 장식하는 외형이 아니라 작품의 생명과 리듬을 조직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시인들은 난해한 사유와 기이한 문자 배열, 온갖 기호와 이미지를 동원하여 새로운 시의 길을 찾으려 한다. 물론 이러한 실험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시는 다른 예술과 결합할 수도 있고 새로운 장르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표현 방식이 등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의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과 다른 예술의 표현 방식을 빌려오는 일은 구별되어야 한다. 사진과 미술, 수학과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환영하더라도 그 때문에 시 자체의 형식과 리듬에 대한 질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한국 자유시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시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 시의 발전인가.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독자의 무지로 돌리는 태도가 정당한가. 시를 갈고닦는 일보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일이 더 중요해진 것은 아닌가.
한국시의 위기는 독자가 사라지는 데에만 있지 않다. 시가 무엇인지 시인 자신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데에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시를 죽이자. 정확하게 말하면 형식 없는 자유를 자유시라고 믿어온 낡은 관념을 죽이자는 것이다. 시의 이름으로 유지되어 온 안일한 창작 태도와 근거 없는 우월감, 리듬 없는 문장을 시라고 주장해 온 오랜 습관을 끝내자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말이 지닌 소리와 호흡을 되찾고, 노래에서 출발한 시의 음악적 본질을 회복하자. 정형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정형률을 벗어났다면 그 자리에 새로운 자율형식을 세우자는 것이다.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창조의 책임이 따른다. 시인이 스스로 선택한 형식과 리듬을 끝까지 완성할 때 비로소 자유시는 자유시다운 생명을 얻는다. 한국 자유시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를 죽이자는 것은 시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시답지 않은 것을 버리고 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자는 말이다.
한국시여, 이제는 스스로의 형식과 리듬으로 다시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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