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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절초는 어쩌다 피어 흔들릴까

-민주화공원에 잠든 장기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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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 시인·본지 발행인

 

강연이 끝난 뒤 잡아본 김지하 시인의 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따뜻했다. 행사장에서 잡아본 김근태 의원의 손은 아이의 손처럼 부드러웠다. 김씨돌 선생의 병실에서 처음 뵌 장기표 선생의 얼굴은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았다.

 

어쩌다 부닥친 인연들이었지만 따뜻하게 기억되는 세 분이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한때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과 대립하는 거리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들의 손을 직접 잡아보았을 때에는 뜻밖에도 따뜻한 사람의 체온만이 남았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으려는 항심(恒心)은 대나무 뿌리처럼 질기게 살아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기보다 상대에게 매서운 돌팔매질을 하는 일로 우리 사회는 한없이 바쁘다. 변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지만, 정작 죽음이 눈앞에 닥치기 전에는 누구도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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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어느 날이었다. SBS 이큰별 PD가 마련한 김씨돌 선생의 깜짝 만남을 위해 몇 분을 병원으로 모신 일이 있었다. 당시 김씨돌 선생은 산속 집 근처 나무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뒤 뇌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었다. 나는 그의 책을 출판하고 있던 관계로 병원에 함께 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장기표 선생을 처음 만났다. 김씨돌 선생은 장기표 선생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예고하지 않았던 만남이었다. 단순히 반가워서 흘리는 눈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생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설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김씨돌 선생의 글에는 그를 보살폈던 이승훈 신부와 함께 장기표 선생의 이야기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장기표 선생은 휠체어에 앉은 김씨돌 선생의 어깨를 마치 가족처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두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그 세월이 남긴 상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인생은 드라마이고 때로는 연출이 필요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끊임없이 연출을 시도한다. 정치인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성공을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날 내가 본 장기표 선생에게서는 그런 연출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판단과 신념에 따라 세상을 살아온 사람의 소박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성공도 출세도 권력도 그분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물론 한 번의 만남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그날의 모습만큼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장기표 선생의 장례식 모습을 방송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컴퓨터를 열어 그날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다. 사진 속에는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는 아직도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할 말을 다하고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때로는 답답하다. 그래도 할 말은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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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민주주의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서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자세까지 충분히 성숙했는지는 의문이다. 겉으로는 선진국을 자랑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안과 공포, 증오와 적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편이 아니면 적이 되고, 생각이 다르면 제거해야 할 상대가 된다. 이해와 양보는 나약함으로 취급되고, 상대를 공격하는 일이 용기와 정의로 포장된다. 사람을 키우기보다 쓰러뜨리는 데 익숙한 사회에서 과연 어떤 인물이 성장할 수 있겠는가.

 

왜 우리는 인물을 키우지 못할까. 왜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까. 그러면서도 저마다 지식인이고 지성인이며 선구자이고 선각자인 양 거드름을 피운다.

 

세상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의 정답이 없을 수 있다. 정의와 진실조차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일만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가.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키워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할 문학마저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헤엄쳐 들어가고 있다. 문학이 세상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학이 어느 편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도구가 된다면 문학 자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 되는가.

 

시조차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가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정신으로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어딘가에 기대고 들러붙어야 겨우 체면과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닌가. 한국시는 이대로 늙고 썩어갈 것인가. 제 혼자 잘난 맛으로 무엇을 살려낼 수 있겠는가. 아주 깊이 썩어야 훗날의 밑거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날 병실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김씨돌 선생과 말없이 어깨를 감싸 안던 장기표 선생을 기억한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따뜻했던 김지하 시인의 손과 아이처럼 부드러웠던 김근태 의원의 손을 기억한다. 그들의 삶과 생각이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평가를 받았고,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들의 주장보다도 사람의 체온이다.

 

사람은 떠나고 세상은 여전히 서로에게 돌을 던진다. 그래도 가을이면 이름 없는 들판에 구절초가 핀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흔들리는 것은 연약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쩌다 만나 서로를 미워하고, 어쩌다 헤어져 그리워하는가.

 

구절초는 어쩌다 피어 흔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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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이현성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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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장기표선생을 뵐 줄 몰랐네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1년여 뵈며 좋은 말씀 들었었는데, 그리고 얼마전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안타까워 했는데 여기에서 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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