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으로 가는 길/유시연(소설가)
-짧은소설/사진 유시연
본문
유시연
2003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오후 4시의 기억』, 『달의 호수』, 『쓸쓸하고도 찬란한』.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바우덕이전』, 『공녀, 난아』, 『벽시계가 멈추었을 때』, 『허준』. 에세이 『이태리에서 수도원을 순례하다』 등. 정선아리랑문학상, 현진건문학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리토피아》 편집위원.
그 길은 멀었다. 큰 도로를 건너 오솔길을 지나 딸기밭이 나타나면 둑방이 보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모과나무 가지에 앉아 천연덕스레 울었다. 노랗게 익은 모과의 향기를 쪼아대며 까마귀는 먼 하늘을 향해 짖어댔다. 그 풍경이 아득해보였다.
여자가 그 마을에 둥지를 튼 것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마고할미가 기다란 두 팔을 벌려 자신의 넉넉한 품안에 생명을 가둔 듯 너른 강이 흐르는 것 같았고 그러했기에 여자는 강의 유순함과 넉넉함을 믿었다. 강이 어떻게 인간과 짐승과 대지를 살찌우며 조용히 흐르는 것인지 어떻게 덧입은 상처를 아물리며 바람의 파고를 견디는지를 알았다.
십여 년의 시간을 함께 했던 남자와 헤어지고 여자는 막막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여자는 조용히 강마을에 스며들었다. 그 세월이 십 년이었다. 객지에 자식을 떠나보낸 이웃 여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여자는 차츰 지나간 기억을 잊었다. 여자가 겪었던 배신과 쓰라림의 역사가 서서히 아물어갔다. 때때로 무료한 시간의 틈을 비집고 지나간 상처가 고개를 들기도 했다. 여자는 아득해진 상처의 나날들을 시간과 흐르는 강에 흘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과거를 추억으로 삼아 지내는 법을 터득했다.
어느날 문득 여자는 헛헛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강이 그녀에게 너무 멀다고 느꼈다. 멀리서 바라보는 강이 아닌 가까이에서 실체를 느끼고 싶었다. 여자는 강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큰길을 지나 작은 밭둑을 걸어 둑방에 올라섰을 때 여자는 갈대가 가득 흔들리는 강변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갈대밭을 향해 걸었다. 눅눅한 습기가 바닥에 고여 있는 갈대밭은 넓고 넓어서 그곳을 지나가려면 해가 저물어야 할 것 같았다. 갈대숲에 숨어 있던 새 떼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끼들을 노리는 뱀이 웅크려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여자는 키 높이만큼 자란 갈대를 해치며 강을 향해 가려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갈대 줄기를 잡고 앞으로 나아가려다 잎사귀에 스치며 손에 혈흔이 흘렀다. 곳곳에서 둥지를 틀고 있던 새들이 빽빽거리며 경고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온통 누런 갈대만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강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갈대숲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지친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드러누워버렸다. 가을이 깊어가는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가고 갈대가 흐느적거리며 바람 소리를 냈다. 여자는 이렇게 강을 가까이 두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 본 기억이 아득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여자는 중얼거렸다. 강에서 수영을 하고 다슬기를 잡고 물의 촉감과 무거움과 가벼움을 온몸이 문신처럼 각인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오랜 시간동안 강물에 뛰어들 생각을 못했을까. 여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월 탓이라고, 바람 탓이라고, 이별 탓이라고 스스로 둘러댔다. 운명처럼 가깝다고 느꼈던 강과 멀어진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향유하고 만지고 느끼고 사유하며 살 수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여자는 강의 본질에 닿고 싶었다. 강에 뛰어들어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강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여자가 살아온 지난 세월의 길이만큼 멀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강으로 가는 길을 향해 발걸음을 디뎠다. 갈대가 가득 덮인 강변에 노을이 졌다.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며 붉은 노을은 긴 꼬리를 흐느적거리며 강을 건너고 있었다. 물결에 흔들리며 뒤채이며 물을 건너고 있었다. 노을이 발을 담근 강은 깊고 넓고 멀었다. 여자는 언제 다다를지 모를 그 강을 향해 다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모과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천연덕스럽게 울며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Copyright © 한국문화예술신문'통' 기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1
이성필 시인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