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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치읓] 예찬/이상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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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중에 가장 화려한 글자는 ㅊ[치읓]인 것 같다. 그런대로 나이를 먹고 생각해 보니 화환, 환희, 환함 등 화려하다고 쓸 때의 ㅎ[히읗]은 어렸을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화려하지 않다. 황당한 인식이지만 여간 실망스럽지 않다. 그래도 얼마쯤 나이를 더 먹으면, 언젠가는 ㅎ[히읗]을 예찬하는 글 또한 쓰게 될 성싶다.


ㅊ[치읓].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처럼 슬며시 광대가 올라가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가령 치-, 쳇, 하고 삐치는 경우라 해도 고 뾰로통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찰칵, 불이 켜진다. 이는 너무 삽시간에 벌어지는 일이어서 어떻게 정리할 겨를이 없었다. 


젊은 날에는 이렇게 황망히 지나가던 찰나의 순간들이 이제는 마음결에 묶이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를 먹긴 먹은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이 별빛을 보고 구름 위에 수많은 촛불이 켜져 있다고 했었던 것도 다 이런 느낌이었나 보다. 


가느다랗고 보들보들하며 엷게 스미어드는, 그 야들야들하거나 포근하게 넓게 퍼져 나오는 밝음의 편안함이란 얼마나 순식간에 깊이 스며드는가. 게다가 조금이라도 추위를 느낄 때 만나는 한 줄기 빛은 또 얼마나 따뜻한가. 설사 그 빛이 칠흑 같은 밤의 국도를 달리며 만나는 창을 통한 빛이거나 전봇대 혹은 가로등의 빛이라 해도 보는 순간 주변 공기를 얼마나 따스하게 만드는가.


빛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싸다. 무게가 없다. 가볍다. 그리고 스스로 타들어 간다. 단, 쳐다보기만 해도 감기가 들 것같이 차가운 편의점 불빛은 다 걷어다가 한 편에 쟁여 놓고, 할 수만 있다면 종일 입김이라도 불어서 온기를 불어넣고 싶을 만큼 예외다.


ㅊ[치읓]. 

ㅊ[치읓]은 언어이고 명사다.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우리나라 말인 한글 자모의 열째 글자다. 사전에는 여기에 모음 첫 자를 붙여 초성으로 쓰일 때는 ‘차’에서처럼, 종성으로 쓰일 때는 ‘꽃’에서처럼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간적으로 숨을 거세게 내쉬면서 발음하는 동시에 마찰도 함께 일어나 무성 유기 파찰음이라 한다. 뭔가 구수하고 진중한 맛을 풍기는 ㅈ[지읒]보다는 세면서 화려한 소리.


한글 자모란 한글의 말소리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낱소리글자를 말한다. 이는 1527년에 최세진이 『훈몽자회』에서 밝힌 바,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 주로 음소라 칭하고 있다.


음소. 음소들이 만나면 단어가 된다. 음소들이 만나서 단어가 될 때, 거기엔 묘한 부서짐이 있다. 모음이나 받침, 발음 같은 것. 그런 후에 그것들은 자기 가치를 버리고 하나로 뭉쳐 오롯이 하나의 의미로 빛나게 된다.


ㅊ[치읓]은 그런 한글 자모의 열째 글자다. 생경하지만 이 열[10]이라는 숫자도 인생 세간에서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누군가 말을 할 때 울리며 소리를 탄생시키는 목젖으로 공기의 길을 막아 콧길을 차단하고는 혓바닥으로 입천장을 한번 툭 치고 나오는 파열음 ㅊ[치읓]. 


ㅊ[치읓]은 어쩌면 가장 완성도 있는 마침표 같은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특히 받침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러니까 어떤 글자의 아래서 발판 구실을 할 때 그 글자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ㅊ[치읓] 받침으로 끝나는 글자의 그 유려함과 화려함이, 또는 깊이가 극에 달한다는 점에서, ㅊ[치읓]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각 사람의 무늬도 사람들의 만남도, 글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을 나타내는 人[인] 자를 보더라도 사람은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로 기대어 저마다 서로를 의지하며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설 수 있고, 그제야 자기 정체성과 가치가 적실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모두 누군가에게 꽃이요 빛이다. ㅊ[치읓]처럼, 혼자 있을 때는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음소요 음가지만, 어느 모음과 만나서 하나가 되거나 어떤 자모의 아래서 발판 구실을 할 때 비로소 환하게 제 가치를 드러내는 ㅊ[치읓]처럼, 사람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관계 안에서 상대를 빛나게 하고 따스하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 조금 더 맑고 밝고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가벼운, ㅊ[치읓] 같은 사람. 만나는 이들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서로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만들거나 유려한 웃음과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ㅊ[치읓]이 만드는 꽃이나 빛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사람.


얼마 전, 새빨갛고 뭔가 금가루가 묻은 것 같은 손가락을 만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는데, 그 손놀림이 퍽 이뻤다. 그래서 나는 또, 나도? 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체념하듯이, 속으로 쳇, 하며 다시 자신으로 돌아와 아무도 모르게 혼자 괜히 뾰로통해졌다. 내 성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 네일아트 손톱과 손가락이 떠오른다. 


나도 한번 칠해 볼까. 한 번도 칠해 본 적이 없는 빨간 매니큐어를, 아니 색깔이 있는, 그것도 되도록 진한 매니큐어를 바르고 어느 날 천천히 자연스럽게 혹은 짠-, 또는 착- 나타나는 그런 등장을 해볼까. 그랬을 때, 나를 아는 이들에게 그 등장은 얼마나 느닷없는 놀라움이 되고 순식간에 번지는 반가움이 될 것인가. 또 누구의 여여한 일상에다가는 얼마나 새로운 설렘을 선사하게 될까. 


가끔은 그렇게 아는 이들에게 야트막한 놀람이 되고, 더러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면서, 세상살이가 고달픈 이에게는 어처구니없어 하며 한껏 웃을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은 또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러는 쉼이 되고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뭔지 모를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내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금가루로 꽃을 그려서 입힌들 어떻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는 삶이 바로 ㅊ[치읓]같이 사는 것 아닐까.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더니 가지를 뻗어간다. 생각만 해도 참 좋은 ㅊ[치읓]. 그, 생각의 얼개를 본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행복을 느끼는 마음은 또 얼마나 찬연한가. 마음, 신경의 갗. 촘촘하고 촉촉하고 따뜻한 이것. 내 이것. 이 따스함을 간직한 채 본격적인 겨울 채비를 한다. 


단순하게 웃을 일 별로 없는 세상에서 골다공증처럼 구멍 난 마음을 채워 주고, 주변인들을 한껏 축복하면서, 인생 세간의 모든 상황을, 사물을, 사람을 향한 꽃말을 만들어 심어 주고 키워가는 ㅊ[치읓]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생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이들의 마음과 삶을 비추어 그들을 더 아름답게 빛내 보자고 마음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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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이경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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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엉뚱한 모습의 삶일지라도 옆의 사람,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아하면서도 웃음 띤 얼굴을 마주하게 할 수 있으면 그것 또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인님의 삶에도 자신을 꽁꽁 싸매는 규율 같은 철저한 삶보다는 자유분방하다 싶은 그런 삶을 떠올려 보심도 좋은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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