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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이거나 쾅이거나/이성필

  주택복권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주 한두 장씩 샀다. 빠지지 않고 사도, 복 없이 늘 꽝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서, 집 한 채는 마련했는데, 아들이 사업 담보로 말아먹었다. 인생도 꽝이었다.   …

꽃밭에 앉아서/이성필

 (무등산 서석평전)   억겁의 시간 속에서 셀 수도 없는 별들이 뜨고는 진다. 천년의 별 뜨고 지는 거 운이 좋으면 한 번 보게 될까. 나는 밤마다 이미 타버린 어제의 별들만 바라보고 있네.   꽃씨가 떨어져 꽃이 되는 걸 봄…

누가 내 이름을 지운다/이성필

  창틀의 먼지를 털다가 생각한다. 사람과의 긴 먼지 같던 시간들.   누구는 만나면 술 먹고, 누구는 만나면 얘기하고, 누구는 만나면 산에 가고,   그와는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이였음을, 먼지로 쌓인 날들이라고 탁탁 털 …

시계는 없어도 산다/이성필

    생각나서 그냥 연락하고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목적 없이도 연락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계도 전화도 귀해 첫눈 오는 날에 역전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던 약속. …

소중한 한마디/이성필

    일주일 만에 만난 사람은 일주일만의 인사를 한다.    한 달 만에 만난 사람은 한 달 분량의 안부를 묻는다.    떠난 지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다가오는 사람.    …

순탄치 않은 비/이성필

    좋은 분 같아요, 하는 말이 바보 같아요, 로 들릴 때가 있다. 호떡을 먹으면서 개떡을 먹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호떡을 맛으로 먹냐!” 그러면 “그럼요!” 그래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용현…

백두대간 길에서·6/이성필

  빼재에서 동엽령 가는 길 햇살은 은빛 빗살 치는데 그럴듯해 보이는 봉우리와 봉우리 틈새와 사이로 어둠은 언뜻언뜻 깃들어 나는 먼 하늘 생각으로 주름지고 갈미봉 대봉 못봉 굴곡이 많다 달음령 지나 싸리동재 누군가는 힘이 부쳐 하산을 하고 …

소백산 편지/이성필

    소백산에서 편지를 쓴다 천동계곡 길에서 쓰고 주목군락지 길에서 쓰고 비로봉 갈림길에서 쓰고 비로봉에서 쓴다 소백산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 지금 무슨 양떼들이 지나가는지 먼 능선에 햇살이 몇 겹으로 쏟아져 내리는지 …

화석/이성필

  살아 있었음이 사진처럼 흙에 박힌   아버지는 물고기 새 도마뱀 들꽃처럼 흩날리던 세월   축축한 습지대 저 아프리카의 원시림에서 곰팡이처럼 피어나던 목숨   아름다운 세상 꿈꾸며 피던 꽃 지던 노을 불던 바람…

사는 일/이성필

    혼자 있을 때 사는 건 신문을 보는 일 밥을 먹기 전에 밥상머리에다, 식구처럼 우선 신문을 펼치는 일 밥을 먹으며 신문에 풍덩 빠지는 일 그렇게 날 잊는 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사는 건 무조건 떠드는…

걸었다/이성필

  친구 덕분에 물때를 배운다 내 생전에는 관심도 없이 지나갔을 일 늘그막에 친구는 어부가 되고 나는 어부의 친구가 됐다 젊어서 윗물에서만 살던 사람이 아랫물 해남까지 내려가서 낙지를 잡는단다 밤낮 없이 바다 물살은 들어오고 …

꿈속에서 죽었다/이성필

    조금씩 모자란 꿈을 꾸었다. 열 개가 필요한데 아홉 개밖에 없었다. 다섯 개가 있어야 하는데 네 개밖에 없었다. 늘 조금씩 부족했고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    모자라게 주어서 주고나면 죽었다. 줄 때마다 조금…

눈물을 줍는다/이성필

  노래를 들으면 시가 안 써집니다. 책을 읽으면 시가 안 써집니다.    풀처럼 걸으니 시가 보입니다. 여기저기 시가 떨어져 있습니다.    몸의 작은 부스러기들입니다. 그 중에서 심장 몇 개를 줍습니다.&…

국밥이 시다/이성필

    시 한 편 쓰면 하루가 가니 하루가 시 한 편이었던 거다. 국밥을 먹으면서 지는 하루이니 하루가 국밥이었던 거다. 시 한 편 쓰자 하루를 사니 하루가 시 한 뚝배기를 준다.   하루를 한 수저 뜨니 미련과 후회 반성 추억이 …

내 마음의 비애/이성필

    내 마음의 비애는 동그랗게 구르는 자전거바퀴다. 서 있을 때도 동그랗고 달리는 순간에도 동그랗다. 어제와 어제의 어제 그 어제가 둥글게 스크럼을 짠다. 내 마음의 비애는 동그란 지구를 닮아가며 동그랗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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