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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의 마이한반도


‘거짓’이 ‘세상’과 ‘시’를 이끌고 간다

-‘시적 상상력’의 재미있는 얼굴•1(사진 : 청라국제도시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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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적 사고의 흐름과 이과적 사고의 흐름

 

이 시대 우리의 사고 패턴은 아주 다양합니다. 이 패턴을 단 몇 가지로 구분하여 어떤 설명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백발백중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이야기의 출발을 위해 혹은 어떤 논리의 시작을 위해 약간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놓고 패턴의 분류를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이제 거짓이 세상과 시를 이끌고 간다라는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 가장 손쉬운 패턴 한 가지를 끌어오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필자가 계간 리토피아의 칼럼을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모 지역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초청으로 두 차례의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듣는 분들이 대부분 대학원 이상의 학력자여서 강의를 준비하는 데 고심을 많이 한 적이 있습니다. 섣불리 준비했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제 능력과 강의 준비가 그분들에게 맞추기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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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뒤에 필자는 근본적으로 그분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이 이공대 출신으로 이과적 사고의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의 내내 필자의 이야기가 잘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과적 사고의 흐름 속에 필자의 문과적 사고의 흐름을 보여주었으니 적지 않은 이질감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이 문과적 사고와 이과적 사고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 설명은 오로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패턴의 구분은 어차피 오류투성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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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아이가 둘입니다. 한 아이는 문과 출신이고, 한 아이는 이과 출신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과 출신은 취업이 상당히 빠르더군요. 두 살 위인 첫째아이가 취업에 성공한 것은 둘째 아이가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에 성공하던 시점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이가 성격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인 것 같습니다. 고교시절 문과 이과 나뉘어 공부하던 시기에는 별로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큰 아이는 부쩍 말이 많아지고 감정적이고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오히려 말수가 적어지고 냉철해지고 건조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큰아이는 시간만 나면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데 둘째는 가능한 한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한 말만 아주 단순하게 뱉어내는 것입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성격이 그럴 수도 있으니 이 점도 참고를 바랍니다. 또 어떤 아이의 성격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를 필자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문과에서는 주로 거짓말을 가르치고 거짓말을 배우는데 이과에서는 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참말을 가르치고 참말을 배우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까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계속 밀어붙이자면 저는 이과적 성향일물일어설에 입각한 논리적 실증적 성향이라 판단하고, ‘문과적 성향비논리적 부정적 성향이라고 규정해 봅니다. ‘이과적 성향은 매사에 답이 있으며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분명 답이 있다는 성향인 반면, ‘문과적 성향은 매사 정확한 답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과적 성향인 답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거짓말의 생성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이과적 성향의 흐름 속에는 이 거짓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닿자마자 튕겨나갈 경우도 생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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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시시껄렁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시적 상상력의 문제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가장 보편적인 거짓말에 관해서입니다.

 

필자는 여러분들보다 더 배우지 않았습니다. 학문적인 공부는 더 하지 못하고 주로 거짓말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그런 직업인인 문학인이 되었습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산문도, 평문도 약간씩 씁니다. 그런데 이 직업이 보통 재미있는 게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거짓말을 멋지게 할수록 독자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시는 을 찾으려고 들거나, ‘진실을 구하고자 하면 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필자가 내린 오류투성이의 결론은 어디에도 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나 진실은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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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들은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과연 인지 거짓인지 한번쯤은 돌아보지 않으셨을까요. 필자가 보고 듣지는 않았지만 억지 결론을 내려 본다고 하면 모두가 결코 증명할 수 없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필자의 이야기도 분명히 거짓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애시당초 거짓말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논리를 밑바닥에 깔고서 출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이 며느리가 어느날 길거리에서 필자를 보자마자 아버님하면서 뛰어와 내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전 깜짝 놀라버렸고 상상도 못했던 이 일로 며느리에 대한 제 생각도 차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였지요.

 

밖에 나가 이 일을 친구 몇에게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반응이 다양했습니다. ‘솔직하고 활발한 며느리이네.’, ‘부럽다. 요즘 그런 며느리도 있구나.’, ‘그래. 좀 더 기다려 봐. 시아버지 곁에는 접근도 안 할 것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제 며느리의 시아버지 손을 스스럽없이 잡는 태도는 참이었을까요. 거짓이었을까요. 이 말을 들은 다른 분들의 말은 참이었을까요, 거짓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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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란 것은 참 궁색한 것이다. 속마음을 숨기고 주변 사람 기분 좋게 해주는 일이 꼭 거짓이라 할 수 있느냐. 요즘 좀 친절하면 금방 경계합니다. 저 사람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혹시 날 이용해 먹으려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속마음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끝없이 원합니다. 그런데 이 상대방의 속마음을 아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대의 속마음 알려고 애쓰지 말아야 되겠지요. 헛일입니다. 친절하게 대해주면 그 친절을 고맙게 받고 받은 만큼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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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이성필 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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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는 시간, 밖은 밤이고 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거짓’이 ‘세상’과 ‘시’를 이끌고 간다.
궁금했던 세상이 환해지고 속이 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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