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의사 순국 98주기, 대만 타이베이 순국 현장에서 추모식 열려
-김상호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 일본 측 사료 근거로 '우발적 의거설' 반박… 치밀하게 준비된 항일거사 강조
본문

<조명하 의사 순국 98주기 추모식 참석자들이 타이베이 옛 형무소 터에서 태극기와 추모 현수막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 교민과 대만 학계 관계자 등이 함께했다.>
일제의 심장 겨눈 23세 청년 독립운동가, 98년 만에 다시 부르는 이름
한국 교민·대만 학계·한인단체 함께 추모… 한·대만 공동 역사 기억과 미래세대 교육 필요성 제기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일본 왕실의 핵심 인물을 겨냥해 항일 의거를 일으킨 조명하(趙明河·1905\~1928) 의사의 순국 98주기 추모식이 10월 10일 대만 타이베이 옛 형무소 터에서 열렸다.
이번 추모식은 조명하 의사가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27분, 불과 23세의 나이로 순국한 역사적 장소에서 거행됐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순국 98년이 흐른 오늘, 한국과 대만의 참석자들은 청년 독립운동가가 마지막 생을 마감한 현장에 모여 그의 항일정신과 희생을 기렸다.
이날 행사에는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슈핑(修平)과기대학교 관광창의대학 학장을 비롯해 대만 정치대학교 한국어과 린요우이(林侑毅) 학과장, 현지 교민과 한인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조명하 의사의 사진과 의거 관련 자료가 전시된 옛 형무소 터에서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되돌아보며, 한국과 대만이 함께 기억해야 할 항일 역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10월 10일 대만 타이베이 옛 형무소 터에서 열린 조명하 의사 순국 98주기 추모식. 김상호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이 참석자들에게 조 의사의 항일 의거와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 왕실 핵심 인물을 겨눈 청년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는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시 도심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무개차를 타고 이동하던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를 습격했다.
구니노미야는 당시 일본 왕실의 유력 인사이자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으로, 일본 군부와 황실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를 겨냥한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단순한 개인에 대한 공격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 권력의 핵심을 향한 항일 저항이었다.
조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됐으며, 이후 일제 당국의 조사와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같은 해 10월 10일 오전 10시 27분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순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23세였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의거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맞선 한국 청년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김상호 교수, 일본 측 기록으로 '우발적 의거설' 반박
이번 추모식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 김상호 학장의 추모사였다.
김 학장은 그동안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둘러싸고 제기돼 온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해석에 대해 당시 일본 측 사료를 근거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제시한 자료는 조명하 의거가 발생한 지 불과 7일 뒤인 1928년 5월 21일 척식(拓殖)통신사가 발간한 『구니노미야 전하 습격 사건의 진상』이다.
이 자료에는 조명하 의사의 체포 직후 상황과 조사 과정, 진술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 의사는 경찰에 체포돼 주청(州廳)으로 연행된 뒤 "어서 죽여라!"라고 외쳤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구토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그는 모르핀을 복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료에는 조 의사가 과거 한약방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약학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김 학장은 이러한 기록이 조 의사의 의거 준비 과정과 체포 이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조 의사는 의식을 회복한 뒤에도 5월 20일까지 사건의 전모를 밝히지 않고 완강하게 진술을 거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 관헌의 집요한 심문에도 그는 "연루자는 없다. 나 혼자 생각해서 한 일이다. 범인은 없다. 전하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한 일이었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기록에는 조 의사가 조사 과정에서도 위축되거나 겁먹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김 학장은 이 같은 기록을 근거로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고민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거사였다"고 강조했다.

<거리에서 우연히 촬영된 조명하 의사의 모습(왼쪽)과 의거 이후 체포·구타를 당한 뒤 촬영된 모습. 당시 독립운동의 긴박한 역사를 전하는 귀중한 사진 자료다.>
의거 전날에도 단도를 품고 동선 살펴
김 학장이 제시한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의거 전날인 1928년 5월 13일의 행적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명하 의사는 의거 전날에도 단도를 품고 구니노미야의 동선을 살피며 기회를 엿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 의사가 우연히 구니노미야를 발견해 즉흥적으로 공격했다는 기존의 일부 해석과 배치되는 정황이다.
김 학장은 일제 당국은 물론 일부 연구자와 대만 언론에서도 제기돼 온 '우발적 범행'이라는 주장을 당시 사료에 비춰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단순한 우발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의 거사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의거에 이르기까지의 준비 과정을 축소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의 기록과 사료를 면밀하게 검토해 조명하 의사의 의거가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의식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올바르게 밝히는 것이 양심 있는 학자들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김 학장은 이미 당시 일제가 출판한 관련 사료가 상당 부분 수집돼 있다며, 앞으로도 체계적인 연구와 새로운 사료 발굴을 통해 조명하 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규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는 독립운동사의 한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식민지 권력이 작성한 기록을 다시 검토함으로써, 그동안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의 의지와 행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복원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사건 발생 직후 작성된 일본 측 기록이 의거의 계획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됐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명하 의사에 대한 역사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한국과 대만이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
이날 추모식에서는 조명하 의사의 항일투쟁을 한국과 대만이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만 정치대학교 한국어과 린요우이 학과장은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대만이 함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린 학과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조명하 의사의 삶과 뜻을 되새기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한·대만 간 이해와 우의를 더욱 깊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한국과 대만의 젊은 세대가 이러한 역사를 함께 배우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학술과 문화 교류가 더욱 활발하게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한국인이 대만에서 일본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두 지역의 근현대사가 만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독립운동이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대만에서도 전개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조명하 의사의 행적을 발굴하고 관련 자료를 연구하는 작업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지리적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한국과 대만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98년 전 순국 현장에서 다시 확인한 항일정신
이번 추모식이 열린 타이베이 옛 형무소 터는 조명하 의사의 마지막 생애와 직접 연결되는 장소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형무소의 모습과 주변 환경은 달라졌지만, 현장에 남아 있는 오래된 석벽과 벽돌 구조물은 당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날 참석자들은 조명하 의사의 사진과 역사 자료를 함께 살펴보고, 순국 현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추모의 뜻을 나눴다.
행사 현장에는 조명하 의사의 얼굴 사진과 의거 관련 설명 자료가 전시됐으며,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그의 독립정신을 기렸다.
특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과 젊은 세대의 참석 모습은 조명하 의사의 역사가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머물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이번 추모식의 의미를 더했다.
참석자들은 조명하 의사의 의거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그의 항일정신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올바르게 계승하고 한·대만 간 역사·문화 교류를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잊힌 역사를 되찾는 일, 독립운동의 의미를 완성하는 길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장면이지만, 그의 생애와 거사 준비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면밀한 사료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추모식에서 김상호 학장이 제기한 '우발적 의거설'에 대한 재검토 요구는 그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영웅적 행위 자체를 기리는 일과 함께, 그 행동이 어떠한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결단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긴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사실과 정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면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27분,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스물세 살 청년의 삶은 끝났다.
그러나 98년이 지난 2026년 10월 10일, 같은 장소에 다시 모인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남긴 항일정신을 되새겼다.
조명하 의사의 역사는 이제 한 사람의 희생을 추모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한국과 대만이 함께 연구하고 기억하며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공동의 역사적 과제로 이어지고 있다.
스물세 살에 멈춘 청년의 시간은 98년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독립의 뜻과 역사적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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