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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 의사 대만 의거 98주년 기념식, 타이중 현장서 엄수

-난 5월 14일 오전 의거 시각에 맞춰 대만 타이중 의거지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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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14일 오전 의거 현장에서>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彥)는 누구인가? (사진 조명하 의사 연구회 제공) 

 

조명하 의사의 숭고한 항일 독립정신을 기리는 의거 98주년 행사가 지난 514일 오전 의거 시각에 맞춰 대만 타이중 의거지 현장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이번 행사는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슈핑과기대 학장의 주도로 민주평통 대만지회(지회장 김규일)의 협력하에 전대만신문화협회 천옌빈(陳彥斌) 집행장,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 민족지도자 린시엔탕(林獻堂)의 증손자인 린청쥔(林乘俊) 밍타이(明台)고등학교 교감, 1928년 일본 육군성의 자료 타이중 사건에 관한 군부의 입장 건 台中事件する軍部立場을 번역한 길정준 선생 등이 참석해 조명하 의사의 뜻을 기렸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항거하며 의거를 단행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현장에서 조명하 의사 연구회는 당시 일왕의 장인이었던 구니노미야 육군 대장을 노리고 대만에서 단독으로 거사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일제의 보도 통제와 어느 독립 단체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점 또 대만에서 의거했다는 이유로 조 의사의 의거가 그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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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9-1927. 11 일본 유학시절의 조명하 의사>

 

김상호 교수는 조명하 의사의 희생과 용기는 오늘날에도 자유와 평화, 인간 존엄의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한대만 양국 국민이 역사의 아픔을 넘어 평화와 문화 교류의 미래를 함께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조명하 의사는 1928514일 타이중시 자유로 22호 도심 도로 환송 인파 속에서 뛰쳐나와 단도에 독을 바른 칼을 무개차를 향해 던져 구니노미야의 어깨에 찰과상을 입혔다. 찰과상을 입고 겁에 질린 구니노미야는 거사 다음날인 515일과 517, 525일 순시 일정을 소화하며 각각 타이베이와 지룽(基隆), 펑후(澎湖)에서 병원 진료를 받았고, 한 차례 의사의 집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일제 대만 자료에 남아 있다. 결국 독극물이 전신에 퍼진 구니노미야는 급성 복막염으로 이듬해 1월 사망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조 의사는 그해 1010일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스물셋 나이로 순국했다. 한편 조명하 의사의 의거지는 현재 한국과 대만 양국에서 역사적 기억의 장소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조명하 의사 연구회를 중심으로 관련 학술 및 문화 행사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기자는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1873-1929)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그의 행적과 배경을 본격적으로 파헤쳐보기로 했다. 지난 20여 년간 대만 현지에서 조명하 의사를 연구해온 김상호 교수의 자문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에서 구니노미야가 지녔던 위상과 영향력을 짚어보고자 한다. 

 

구니노미야는 메이지·다이쇼 시기를 거치며 일본 군부와 황실을 잇는 상징적 존재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황족이라는 신분적 배경과 군 경력을 바탕으로 일정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당시 일본 사회에서 황족 출신 군인의 위상은 단순한 군사적 지위를 넘어 국가 권력 구조와 직결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본 황족 출신 군인 가운데 여섯 번째로 군인의 길에 들어선 인물로, 최종적으로 육군 대장에까지 오른 거물급 인사였다. 당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18 년 그의 친딸인 구니노미야 나가코(久邇宮良子)가 히로히토(裕仁) 황태자의 비로 내정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순수 혈통을 중시하던 당시 일본 황실은 1920년 초, 나가코의 남동생인 구니노미야 구니히데(久邇宮邦英)에게 색맹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궁정 내부에서는 이를 신성한 황족 혈통에 흠이 된다라는 이유로 문제 삼으며 혼약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천황 측은 구니노미야에게 파혼 의사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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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이에 격분한 구니노미야는 자신의 명성과 가문의 위신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황실이 파혼을 요구한다면 딸을 죽이고 가족 모두가 자결하겠다라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하였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군부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던 시기였고, 제국주의 팽창 속에서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의 정치적 존재감 또한 상당했다. 천황 측 역시 그를 쉽게 무시하기 어려웠다. 구니노미야는 자신의 가계와 신체적 문제에 대한 재검사를 요구하는 한편, 정계와 언론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 황후 측 역시 황족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이 혼약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구니노미야는 딸을 반드시 황태자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각종 소문과 여론전을 통해 황실을 압박했다. 결국 여론 부담을 견디지 못한 황실은 19212월 혼약에 변함이 없음을 공식 발표했다. 이 과정에 관여했던 궁중 인사들 일부는 면직되거나 보직 이동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인데, 신하가 어찌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라는 말까지 돌 정도로 논란이 컸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구니노미야의 딸 나가코는 1924년 히로히토와 결혼했으며, 훗날 고준(香淳)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훗날 이들 집안 후손 가운데 색맹이 여러 명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그 기세가 천황마저 압도할 정도였던 구니노미야를 척살했던 조명하 의거는 왜 98년이 다 되도록 세상의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이나 일본처럼 관심 지역이 아닌 대만에서 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혹은 김구 선생이나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적 지원과 배후 없이 오직 개인의 결단으로 단행된 의거였기 때문일까? 

 

“23 세라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한 일념만으로 갓 태어난 아들마저 뒤로한 채 홀로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번민과 결심이었을지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조국의 독립이란 대체 그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라는 조 의사의 장손 조경환 선생의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조명하 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 모두 기억하자!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총도 폭탄도 아닌 독 바른 단도 하나로 거대한 시대에 맞섰던 스물세 살 꽃다운 청년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편히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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