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의사 순국 97주기 추모식
-10일 타이베이 한국학교에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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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만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 대장 척살에 나서 당시 일본에 큰 충격을 안긴 조명하(趙明河·1905∼928) 의사의 순국 97주기 추모식이 10일 대만 타이베이 한국학교에서 열렸다.
지난 10여 년간 옛 타이베이 형무소 자리에서 조명하의사연구회 주도로 열렸던 추모 행사는 올해부터 타이베이 한인회가 타이베이 한국학교와 공동으로 거행한다. 오늘 학교 공식 행사가 끝나고 일부는 옛 형무소 자리를 찾아 추모했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슈핑과기대 학장과 타이베이 한국학교 박성대 교장과 교직원, 이수정 대만한인회장과 임원, 대만 중국문화대학 한국어문학과 최세훈 교수, 정수하 대만대 한국유학생회장, 그리고 한국학교 학생 등이 참석했다.
특히 대만 한국학교 어린이들이 〈홀로 아리랑〉과 〈캐논 연주곡〉을 연주하며 조 의사 의거를 기렸다.


김상호 학장은 의거 한 달 후인 6월 14일 최초 보도된 대만 총독부 기관지 대만일일신보의〈호외〉와 이어서 일본에서 출간된 〈구니노미야 폐하께서 겪으신 사건의 진상〉, 〈타이중 사건과 그 후〉의 번역본과 대만 중산(中山)대 박사를 수료한 길정준 선생이 최근 번역한 〈타이중 사건에 관한 군부의 입장의 건〉 등을 종합해 볼 때 “대만 총독부에서 발표한 내용에는 중요한 핵심 사항이 빠져 있다.
보고서에는 흉기가 신변에 닿지 않았고, 범인은 단지 자동차에 접근했을 뿐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상황은 이와 다르다고 전해진다. 정말 그런가?” 당시 타이중 법원 이시바시 검사장의 담화는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된 범행이 정말 단순한 생활고에서 비롯된 것일까?” 의거 직전 종이에 싼 모르핀을 삼켜 의거 후 16일까지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서도 20일까지 단호하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은 점, 육군 차관이 대만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의거 당일 타이중 주(州) 당국은 제복 38명, 사복 17명을 동원하여 연도 경계에 임했음에도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경호 실패를 행정경찰에 책임을 미루는 것과 암호 전보를 보내자 일 왕실에서 전보 내용을 전파하라는 내용, 독검이 구니노미야의 어깨를 스치고 운전사의 척추 좌측에 꽂힌 후 셔츠에서 발견된 0.5cm의 혈흔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조명하 의사가 의거 전날인 13일 오후에도 구니노미야의 동선을 예의 주시하며 따라다닌 점, 조 의사의 소지품은 가재도구와 서적 10권이 있었던 점, “글씨를 잘 쓰는 편으로 보이나, 편지는 한 통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취조관에게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달라"고 외친 점, 부귀원 대만인 동료들 취조에서 조 의사는 단 한 번도 외박을 하지 않았고, 극도로 착실한 생활을 했으며, 특히 신문에 보도된 구니노미야의 동선을 의거 이틀 전부터 주의 깊게 응시했다고 증언한 사실 등이 새롭게 드러났다고 했다.
이수정 대만한인회장은 추모사에서 “오늘 조명하 의사 순국 97주기를 맞아 한인회와 타이베이 한국학교, 조명하의사연구회가 공동으로 이 뜻깊은 행사를 치르게 된 점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며, 다시 한번 대만 한인회를 중심으로 하나가 돼 그분의 업적을 기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박성대 교장은 “조 의사는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단독으로 희생을 감수하셨다. 마침, 지난 8월 국가보훈부의 보조로 교내 조 의사 동상 주변 정화 작업을 마무리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에서 본교의 어린 학생들이 조 의사 살신성인의 정신에서 내 나라 내 조국의 소중함을 배우길 바란다.”
최세훈 교수는 〈청년 조명하, 그 정신의 계승과 오늘의 의미〉란 주제로 특별 대담을 진행하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조 의사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 소중함을 깨닫고, 그들의 희생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다면, 잊혀졌던 그 이름들은 다시 밝게 빛날 것이다.”
끝으로 김 학장은 “조 의사의 의거는 당시 일제의 역사 왜곡과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억지로 외면했던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무관심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라고 했다.

조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09:55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을 바른 단도를 들고 타이중시 도심 도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지나던 구니노미야 대장을 급습했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 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스물셋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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