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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서 조명하 의사 '타이중 의거' 97주년 기념행사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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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김상호 교수 제공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 대장 척살에 나선 조명하(19051928) 의사의 '타이중 의거' 97주년 기념행사가 14일 대만에서 열렸다. 

 

조 의사의 의거 시각인 0955분 대만 타이중 의거지 현장 행사에는 조명하 의사 연구회 회장인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김상호 교수와 대만신문화협회 천옌빈(陳彥斌) 집행장, 1927년 개점했고 조 의사가 일했던 부귀원에서 약 400M 거리에 있는 서점 중앙서국 린청쥔(林乘俊)이사장일제 때 대만 민족 지도자 린시엔탕(林獻堂, 1881-1956)의 증손자, 졍민링(鄭敏玲) 중앙서국 총괄, 서울여대 중문과 조영현 교수, 박윤석 목사 교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KakaoTalk_20250515_062818565-1000.jpg사진 : 김상호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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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의사는 1928514일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을 바른 단도를 들고 타이중시 도심 도로에서 무개차를 타고 지나던 구니노미야 대장을 급습했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10일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스물셋 나이로 순국했다.

  

김 교수는 조 의사가 던진 독검에 목덜미와 어깨를 스치는 찰과상을 입은 구니노미야에 대해 일제가 출간한各皇族實際訪台行程總覽근거 자료에 따르면 구니노미야는 의거 바로 다음날부터 10일간 세 차례나 병원을 다녔고 한차례의 왕진 의사를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겁에 질린 구니노미야의 당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제의 철저한 보도 통제로 역사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그분의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 의거는 아무런 배후나 조직도 없이 그것도 대만에서 단독으로 결행한 의거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대한독립 4대의사 안중근,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의거처럼 끈질긴 독립 투쟁이 없었더라면 1943년 연합국이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강제 점거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했을 때 한국은 여기서 제외돼 전후에도 일본 영토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치열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사진 : 조명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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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남태식 시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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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은 아는데 조명하 의사는 처음입니다. 기사로만이라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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