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래 운동으로 예술혼을 불태우는, 진우 '풍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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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나연 기자
2008년 10월 ‘리토피아’(주간 장종권)와 ‘시를 노래하는 사람들’(공동대표 나유성, 장태산)이 주관하는 창작시노래한마당(당시 6회)에 시노래 ‘산산산’(장종권 시, 진우 곡)과 ‘텅 빈 방’(조운주 시, 진우 곡) 두 곡이 무대에 올라왔다. 대구에서 먼 길을 올라온 시노래 가수 진우(풍경 대표)의 무대였다. 기타 연주와 함께 청아하면서도 무게감이 넘치는 목소리가 객석에 넘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리토피아는 아라쇼츠의 자매지이다. 이후 리토피아는 먼 거리의 그에게 곡을 맡기고 무대에 오르게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일은 단지 예술활동만을 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문화예술로부터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정부의 도움 없이는 밥을 먹기도 힘이 든 형국이 되었다. 결국 정부의 도움을 끌어내는 일은 작품성보다 예술성보다 다른 소통력이 더 중요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예술가도 다른 능력을 겸비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이즈음에 아라쇼츠에 그를 소개한다. 대한민국의 시노래패는 계속 늘어가는 추세이지만 ‘풍경’과 리토피아의 ‘시를 노래하는 사람들’은 최소 20여 년 이상 한우물을 파는 중이다. 리토피아의 ‘시를 노래하는 사람들’도 그동안 시노래 음반 9집을 선보였다.
‘풍경’의 대표 진우는 작곡가이면서 가수이며 공연기획 연출가이다. 그동안 시노래를 1,500여 편 작곡했으며 음반 9집을 발매했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찾아가는 시노래콘서트’를 벌여 25개 소외지역 학교를 순회하며 콘서트를 벌이기도 했다. 문화예술위원회와 법무부의 지원을 받아 2007년 ‘희망, 새로운 시작의 노래’와 2008년 해설이 있는 희망콘서트를 들고 26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활동도 벌였다.
‘이상화문학제’를 주관했고, 도서관협회 포이트리콘서트, 산사음악회 등 년간 100여 회 이상의 공연활동을 벌여왔다. 2007년, 2009년에는 ‘삼국유사 문화축전’을 총괄 연출, 감독했으며, 2010년에는 ‘뮤지컬 단군’, 2011년에는 ‘뮤지컬 수로부인’을 총감독했다. 2011년에는 ‘민족시인 이상화 시노래음반’ 7집을 제작했으며, 동시에 기념콘서트를 열었다. 2012년에는 ‘삼국유사뮤지컬 비형랑’을 총감독했으며, 음악작곡을 맡았다. 2015년에는 시노래음반 9집을 제작했으며, 2020년에는 대구 포크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았다. 2023, 2024년에는 ‘우국시인 대구시인 시노래콘서트’의 전곡을 작곡했으며, 연출을 맡고, 노래도 불렀다. 현재 상화기념사업회 이사이며, 복합문화공간 풍경의 대표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중앙대학교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2001년부터 시에 곡을 붙여 시노래음반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시노래를 시작했다. 리토피아가 나유성 작곡가와 함께 창작시노래를 시작한 해도 2001년이다.
그가 시노래에 곡을 붙이기 시작한 이유는 즉흥적인 가사의 대중음악보다 깊이가 있는 시의 고급언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 그는 현대시라고 하는 한국시가 시노래를 만들기에는 너무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단지 요즘 시인들이 쏟아내는 시로는 대중들과 공감대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 이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노래 운동을 하다보면 우리 한국시에는 몇 가지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첫째는 형식과 리듬이 없어 곡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시인 개인의 독특한 사유세계가 시의 전반적인 얼굴이라서 독자들과 쉬이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 가면서 그는 시노래 작곡과 공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그의 자연스러운 생활 속에서, 혹은 작곡을 의뢰한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시 속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 영감이 그의 가슴과 온몸을 통해 노래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는 이런 영감을 얻기 위해 평소 어부 수준의 바다낚시를 즐긴다. 풍란을 키우는 일과 직접 요리하는 일도 즐겨 한다.
그의 초기는 뮤지컬 기획과 음악감독 이력이 많다. 언젠가 일연선사의 삼국유사를 네 편 연속으로 뮤지컬을 만드는데 총감독과 작곡을 맡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뮤지컬과 만났다. 기왕에 1994년부터 이벤트사를 설립하여 1999년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2000년부터는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역사 관련 곡을 많이 만들었다. 생존 시인들의 시에서 얻기 어려운 감동적인 세계는 작고한 위인들의 시에서 얻었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의 ‘광야’, 한용운의 ‘봄꿈’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독도에 관련해서는 ‘독도로 간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노래도 많이 만들었다.
그는 시작품 제공 시인에게 작곡한 시노래를 불러주고 그 시인이 감격해할 때 가장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이다. 고 문인수 시인과는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문 시인은 만날 때마다 늘 ‘진우는 보배 같은 존재’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거기에서도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추후 활동계획도 스스럼없이 말해주었다. ‘육법공양계송’ 음반을 내고 싶다고 한다. 시노래를 다양하게 보급하며 시노래단체를 지원하고 싶다고도 한다. 대중들과 더 가까운 소통을 위해 복합문화공간인 ‘풍경’ 작업실을 활짝 열어 수시 공연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고 싶다고 한다. 또한 시노래 후배를 양성하면서 좋은 시인들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아 훌륭한 시노래를 만들고, 봉사단체를 만들어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한다. 어려운 곳에서 어려운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가는 그의 앞날에 서광이 깃들기를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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