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끝내 기록되는 것, '윤상삼언론상' 제정을 환영한다
―윤상삼 기자와 한국 언론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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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동 묘소>
한 기자가 역사를 바꾸던 날
역사는 언제나 거대한 영웅들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는 한 사람의 양심이, 한 줄의 기사 한 편이, 한 기자의 집요한 취재가,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였던 1987년 민주화의 물결 역시 그러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학생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학생운동은 곧 국가의 적으로 취급되던 시대였다. 경찰은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서둘러 발표를 내놓았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지금 들으면 믿기 어려운 이 한마디는 당시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내놓은 공식 설명이었다. 권력은 자신들이 만든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언론 역시 대부분 그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는 분위기였다. 진실을 확인하기보다 권력의 발표를 전달하는 것이 더 안전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모든 기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윤상삼은 발표문보다 먼저 사람을 믿어야 했고, 권력보다 먼저 사실을 믿어야 했다. 그는 경찰 발표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정말 그럴까.' 그 짧은 의문 하나가 대한민국 현대사를 바꾸기 시작했다.
윤상삼 기자는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추적했다.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디에 사실이 숨겨져 있는지를 찾아 나섰다. 그는 무엇보다 시신을 직접 검안한 의사를 만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만 해도 검안 결과는 쉽게 공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검안에 참여했던 의사로부터 결정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박종철은 단순 쇼크사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물고문과 폭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윤상삼 기자는 그 사실을 기사로 세상에 내놓았다. 그 순간부터 권력이 쌓아 올린 거짓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경찰 발표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언론은 다시 취재에 나섰으며,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결국 감추려 했던 진실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 불씨는 다섯 달 뒤 대한민국을 뒤흔든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윤상삼 기자는 훗날 자신의 기사가 역사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기자였다. 기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언론은 흔히 '역사의 초고(草稿)'라고 말한다. 그러나 윤상삼 기자가 남긴 기사는 초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기사였다. 우리는 종종 민주주의를 거리에서 외친 수많은 시민들의 함성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함성이 터져 나오기 전에 먼저 있었던 것이 있다. 바로 진실을 알고자 하는 뜨거운 집념이었다.
진실이 밝혀졌기에 시민은 분노했고, 분노했기에 거리로 나왔으며, 거리로 나왔기에 민주주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진실의 첫 문장을 쓴 사람이 바로 윤상삼 기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뉴스를 접하며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 건의 기사가 쏟아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잊힌다. 기사의 생명은 짧다. 그런데도 어떤 기사는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다.
윤상삼 기자가 1987년 겨울 써 내려간 그 기사는 오늘도 언론인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특종이 아니었다. 기자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준 기사였다.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권력과 맞섰던 용기.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끝까지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 그리고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언론인의 책임감. 그 모든 것이 그 기사 속에 살아 있었다.
그래서 윤상삼 기자를 기억하는 것은 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언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기억하는 일이며, 동시에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할 기자정신을 기억하는 일이다.
2026년, 그의 이름을 딴 ''윤상삼언론상''이 제정된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욱 뜻깊다. 그 이름은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새로운 기자들을 향한 질문이 되고, 언론의 양심을 일깨우는 기준이 되며, 진실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언론인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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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윤상삼, 우리는 청춘을 함께 건넜다(사진-지리산 천왕봉, '티루'의 장종권, 강용현, 이현성, 윤상삼, 앞줄 정휘영)
윤상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특종기자가 아니다. 나에게 그는 먼저 고등학교 친구였다. 우리는 익산 남성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했다. 훗날 그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가 달라졌다고 해서 우정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절 우리는 더 자주 만났다. 서울 미아리 부근에 있던 우리 집은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공부 이야기를 하다가 세상 이야기를 했고, 사회를 이야기하다가 문학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젊은 날의 우리는 가진 것은 거의 없었지만, 밤을 새울 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가난했다. 그러나 생각만큼은 누구보다 풍요로웠다.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했고, 정의를 이야기했고, 나라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웃었다. 밤새 웃고, 밤새 떠들고, 밤이 짧은 줄도 모르고 청춘을 보냈다.
그때 우리 곁에는 늘 일곱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가 장난삼아 이름 붙인 모임 '티루', 정휘영, 강용현, 이현성, 나헌식, 이태구(지금은 우리 곁을 떠났다), 윤상삼, 그리고 나, 장종권, 일곱 명은 하나처럼 어울렸다. 시간만 나면 산으로 갔고 강으로 갔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젊음은 그렇게 이유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나이였다. 윤상삼은 그 무리 속에서도 유난히 존재감이 큰 친구였다. 체격도 날렵했고, 인상도 강직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끔 삼국지의 관우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단지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성품도 그랬다.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텁텁하면서도 시원시원했고, 의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좋은 것은 좋다고 말했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를 믿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 무렵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을 문장으로 붙잡아 보려던 풋풋한 시절이었다. 윤상삼은 그런 내 이야기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우리는 문학을 이야기했다. 시를 이야기했고, 소설을 이야기했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기자가 되기 전의 윤상삼에게도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다. 그는 문학을 사랑했고, 사람을 좋아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면 그는 가끔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는 재미가 있었다. 평범한 안부가 아니라 시골 풍경을 익살스럽게 풀어내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아낸 편지였다. 글에도 그의 성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꾸밈이 없고 사람 냄새가 났다. 훗날 그가 좋은 기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윤상삼은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고, 다른 ‘티루’의 친구들도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문학의 길을 걸었다. 직업은 달랐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젊은 날 함께 나누었던 가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윤상삼은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으로 발령이 났다. 친구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만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특파원 생활이 그의 건강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줄은. 타국에서의 치열한 취재와 과중한 업무는 결국 그의 몸을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다. 겨우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윤상삼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함께 산에 가고 강에 갈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예전처럼 웃으며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상삼은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친구 한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청춘의 한 부분이 함께 사라지는 일이다. 지금 그는 광명 가학산에 잠들어 있다. 우리는 가끔 그를 만나러 간다. 말없이 술 한 잔 권하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교시절 '교련' 행군 중, 서있는 친구들 중 가운데가 윤 기자이다>
윤상삼은 왜 지금도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가
사람은 세상을 떠나도 이름은 남는다. 그러나 모든 이름이 오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대부분의 이름을 조금씩 지워 간다. 신문의 기사도 그렇다. 오늘의 특종은 내일이면 새로운 기사에 밀려나고,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도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그런데도 어떤 이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윤상삼. 그 이름 역시 그렇다. 그가 남긴 기사는 종이 위의 활자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속에 새겨졌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처음 알린 보도는 단순한 특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론이 국민을 대신하여 권력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당신들이 말하는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민주주의는 질문하는 사회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민주주의도 함께 무너진다. 그래서 기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답을 쓰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윤상삼 기자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권력의 발표를 받아쓰는 기자가 아니라, 발표의 뒤편에 숨겨진 진실을 끝까지 확인하는 기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간다. 정보는 넘쳐나고, 뉴스는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해서 진실까지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짓은 더 교묘해지고, 사실과 의견의 경계는 더욱 흐려지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윤상삼 기자의 삶은 더욱 큰 울림을 준다. 빠르게 쓰는 기자보다 정확하게 쓰는 기자. 많이 쓰는 기자보다 끝까지 확인하는 기자. 그런 기자가 결국 사회를 지킨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윤상삼언론상'은 한 사람을 기리는 상이 아니다. 최근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총동문회가 중심이 되어 ''윤상삼언론상''을 제정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이 상은 단순히 한 선배 언론인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사업이 아니다. 한국 언론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후배들에게 묻는 하나의 선언이다.
언론인은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조회 수인가. 속보 경쟁인가. 화려한 문장인가. 윤상삼 기자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삶으로 답을 남겼다. "사실을 확인하는 용기." 그것이 기자의 첫 번째 자격이라고. 그 정신은 지금도 조금도 낡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절실해졌다. 오늘날 언론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되찾아야 할 것도 결국 이 정신일 것이다.
2023년 그의 둘째 딸 결혼식에서 오랜 친구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을 때도 그랬다.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였지만, 우리의 마음 한켠에는 윤상삼이 함께 앉아 있었다. "상삼이가 오늘 얼마나 좋아했을까." 누구 하나 입 밖으로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비록 한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은 또 하나의 책임이다. 친구를 기억하는 일은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 아니다. 그가 남긴 삶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다. '윤상삼언론상'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름 속에 담긴 기자정신을 후배들에게 이어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좋은 추모는 눈물이 아니라 계승일지 모른다. 윤상삼이라는 이름이 해마다 새로운 언론인들의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결코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삼이는 끝내 기자답게 살다 갔어." 나는 그보다 더 큰 추도사는 없다고 믿는다. 그의 삶은 길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오래 남았다. 그리고 이제 ''윤상삼언론상''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평생 지키려 했던 진실과 양심은 새로운 세대의 언론인들에게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기자는 무엇보다 먼저, 진실의 편에 서는 사람이어야 한다.“
<추모행사 중, 유가족들이 참가했다>
윤상삼 기자가 남긴 또 하나의 기록, 시노래가 되다
윤상삼 기자는 취재 현장에서만 글을 남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정겨운 편지를 보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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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필 기자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