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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덕의 길


봄이 오는 길

안성덕의 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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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雨水가 지났다. 눈이 비로 바뀐다는 우수절이 지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고 했다. 지난겨울은 그닥 춥지 않았다. 두어 번 서해안과 강원도 영동의 폭설 외엔 별반 눈도 없었다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지라 봄이여 어서 오라, 목 빼고 기다린다. 그러나 세상사 기다리는 것은 쉬이 오지 않는 법 아니던가, 내게 전화하는 사람들 봄 냄새 맡으시라 입춘첩 붙이듯 핸드폰 컬러링을 바꿨다. ‘모닥불을 끄고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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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다. 어디 총칼을 들어야만 혁명이랴. 수선화는 겨우내 어둡고 시린 절망 속에서 새봄을 궁구하고 있었던 거다. 저 여린 새싹이 얼어붙은 땅을 녹였다. 기적처럼 세상을 뒤엎었다. 혼자서는 힘에 부쳐 여럿이 송곳처럼 겨울을 뚫었다. 수선화는 강하다. 아니 생명은 위대하다. 아니 아니 봄은 혁명이다. 춥고 어둡고 긴 겨울을 깨치고 새 세상을 세우려는 봄의 혁명에 기꺼이 한 걸음 보탠다. 한나절 아파트를 벗어나 쉬이 오지 않는 봄을 마중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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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콩 징검다리를 건넌다. 밭은 삼천三川이 졸졸거린다. 징검돌 틈을 빠져나가는 물소리가 한결 순해졌다. 저 돌 틈 사이로 오르내리던 피라미와 버들치, 쉬리는 언제 돌아올까? 입춘 지나고 우수 지나 세상이 바뀌는데, 아직도 깊은 물에서 죽은 듯 겨울을 견디고 있을 녀석들, 저 냇물을 따라가며 쿵 쿵 발걸음 소리 들려줘야겠다. 봄이야, 봄이 왔어, 어서들 깨어나! 아예 밭아 버리지는 않고 겨우내 졸졸거린 저 냇물이 적신 세상은 금세 초록 보자기를 펼칠 것이다. 갯버들 가지에도 삘리리 물이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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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황량한 들판을 건넌다. 텅 빈 들녘이 솜이불을 뒤집어쓴 듯 갑갑한 내 숨통을 열어 준다. 코끝에 맴도는 바람 아직 차건만, 후련하다. 사람의 마을을 둘러싼 산마루가 영락없는 소 잔등이다. 우물우물 계절을 되씹는 것만 같다. 한 마리 무자치처럼 구불텅 기어가는 논두렁도 정겹다. 연고도 없는 마을 앞 논둑길이 꼭 내 고향, 내 피붙이를 찾아가는 그 길만 같아 포근하다. 저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은 오고 있을 것이다. “들 너머 뽀얀 논밭에금세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이다. 산 아래 어디쯤 도롱뇽 알을 풀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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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을을 지났다. 점심상을 물린 노부부가 겨울을 갈아엎고 있다. 한 두렁 두 두렁 저 텃밭에 올해는 무슨 씨앗을 뿌릴는지, 잠시 허리를 편다. 부실한 허리도 주말에 다녀갈 막 피어나는 꽃송이 같은 손주 놈들 생각에 그만 말짱하겠다. 고추를 심을까? 감자를 심을까? 처서 무렵엔 김장 배추를 심어야지, 바리바리 싸줄 자식새끼 생각이 밭고랑보다 길 테다. 갈아엎은 겨우내 묵은 밭이 숨을 쉰다. 바람 한 자락, 햇볕 한 아름, 소나기 한줄금에 텃밭은 푸르게 넘실거릴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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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봄 마중 나왔을까, 어슬렁거리는 누렁이를 두고 왔다. 삼천을 오르내리며 자맥질하는 비오리 떼도 못 본 척했다. 올봄엔 어느 가지에 세를 들까, 깍깍대는 까치 부부도 모른 척 지나왔다. 겨울 끝자락을 서성대는 한나절 해가 아직은 짧다. 돌아오는 길목 어느 집 담장에 영춘화 노란 꽃이 별처럼 떴다. 길가 삼천 노인회에서 가꾼 꽃밭은 묵었고, 나도 꽃이야! 피어날 잡초만 벌써 푸르다. 꽃밭에서 골라낸 돌멩이로 쌓은 돌탑 위에 소망 한 층 얹는다. 마리골드는 올여름에도 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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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움큼 냉이, 쌀뜨물 받아 아내는 국을 끓인다. 세상 어디에도 없고 세상 어디라도 있는 봄이 오는 길을 다녀왔다. 길이 어디 땅 위에만 있으랴. 아직 당도하지 않은 계절을 마중하고 온 한나절, 내 마음에 봄은 이미 촉을 내밀었다. 언 땅을 뚫고 나와 봄을 피워 올릴 수선화처럼 나도 노랗게 꽃피겠다. 봄이 멀어 아직 춥고 어두운 사람들 전화하시라. 나는 부러 그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 김기웅이 만들고 박인희가 부른 노래 봄이 오는 길한 소절을 따라 부르시라.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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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덕 시인은 정읍에서 출생하여 2009<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몸붓, 달달한 쓴맛, 깜깜, 디카에세이 손톱 끝 꽃달이 지기 전에가 있다. 계간 아라쇼츠주간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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