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內藏에 숨다
안성덕의 길·2
본문
여러 날째 쫓긴다. 덜미 잡힐세라 밤새 도망치는 길은 막다른 외길이요, 천 길 낭떠러지다. 여섯 자도 못 되는 몸뚱이 하나 세상 어디 숨길 데 없다. 그러니 꿈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는 수밖에 도리 없다. 도대체 세상은, 세월은 왜 나를 몰아댄단 말인가. 두렵다.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의 첫 번째 문이다. 승속僧俗의 경계다. 이 문에 들어서면 밖에서의 알음알이에 의한 분별심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단다. 번뇌 망상을 말끔히 씻어내고 일심一心이 되어야 한단다. 세속에 찌든 몸 사천왕문四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장산내장사內藏山內藏寺 일주문 옆 산길을 오른다.
벽련암碧蓮庵 가는 길
길은 셋이겠다. 우리네 인생처럼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외길, 갔던 길 그냥 되짚어 나오는 어제 그 길, 윤회처럼 빙 돌아 나오면 다시 처음인 길이겠다. 벽련암碧蓮庵 지나고 원적암圓寂庵 지나 불출봉拂出峰에서 흘러내리는 물 따라 돌아오는 길을 간다. 숨이 턱에 닿는다. 코가 땅에 닿는다. 일주문 아래 우화정羽化停에서 날개를 얻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찍은 발자국 한번 돌아보지 못하겠다. 구부러진 길모퉁이에 반사경이 보인다. 보이지 않은 저편을 살필 수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 인생길에도 구비 마다 반사경이 있었으면……, 산사에 오르는 길이 아직은 푸르다.
백련암白蓮庵이었다가 벽련암碧蓮庵이 되었다. 내장사內藏寺였으나 영은암靈隱庵을 내장사라 부르고 벽련암이 되었다. 서래봉 중봉, 단풍철이면 앞산 뒷산 불이 붙는다. 벽련선원碧蓮禪院 아래 계단을 오른다. 한 발 두 발 올라 잠시 서래봉을 우러른다. 하늘에 구름 한 자락 떠 있다. 구구대던 멧비둘기도 입을 다문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기둥에 묶인 절집 개가 끔벅 실눈을 떴다 감는다. 뒤쪽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친 밥그릇이 보인다. 배고픔이 두렵고 추위가 무서워, 일만 년 전 산에서 내려와 스스로 목이 묶였다는 늑대 아니랴. 풍경風磬도 숨을 죽인 대웅전 앞에 맨드라미가 붉다. 동안거 결제는 멀었건만 선방禪房 댓돌 위에 신발 가지런하다.
원적암圓寂庵
원적암 가는 길, 내장內藏은 적막강산인데 이명耳鳴이 시끄럽다. 서래봉 아래 산허리를 돌아간다. 굴참나무에 게으름 나무라는 겨우살이가 붙어있다. 뭐 하는 중생인고! 도토리 줍던 다람쥐가 쫑긋 나를 구경한다. 원적암 마당에 털아귀 꽃이 피어있다. 노랗게 나비 한 마리 내려앉는다. 꽃이 나비를 청한 걸까, 나비가 절로 찾아든 걸까? 맑은 하늘에서 뜬금없이 후두두 비 듣는다. 처마 끝에 풍경처럼 매달려 여우비를 피한다. 예고 없는 게 어디 소낙비뿐이던가. 신우대 잎에 빗소리, 죽비를 친다.
마음 시끄러운 날이면 걸레에 수수 빗자루 들고 와 빈 절을 쓸고 닦고 간다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이가 쓸고 닦은 건 결국 제 마음이었겠다. 극락전은 텅 비었고 마당귀엔 쇠비름꽃이 피어있다.
백련암 계곡
마음 떫은 나처럼 누군가 땡감 한입 베어 물다 뱉어버렸다. 불출봉에서 흘러내린 저 물, 흘러 흘러 서해에 가 닿을 것이다. 발자국을 부축하며 나도 또 시끄러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길이 가른 길에 다리가 놓였다. 오늘 이 길이 내 어제와 내일을 이어줄 것이다. 시월 초순, 다다 다 다람쥐 발걸음 소리 딱딱 딱 딱따구리 목탁 소리 도란도란 개울물 소리 저벅저벅 내 발걸음 소리가 맑다. 내 안의 묵은 때가 씻기니 세상이 들린다. 세상이 보인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물 따라 내장사 담벼락을 끼고 돈다.
108 단풍터널
108 단풍길 저편에 소실점으로 일주문이 다시 서 있다. 이 길을 걸어 나가 일백여덟 개의 번뇌 속으로 다시 나서야 한다. 우화정에서 신발 끈 고쳐 매고 세상 속으로 다시 나서련다. 소실점 뒤 뭐가 있으려나, 건너가 이쪽을 돌아보면 이쪽이 피안彼岸이려나? 안 內 숨길 藏 내장內藏, 임진왜란 때 안의·손홍록 선생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이안移安해 지켜낸 깊은 곳이다. 한나절 나를 숨겼다 내놓는다. 세상 어디에도 숨을 곳 없음을 안다. 원적암부터 돌면 쉬운 길이라지만 오늘은 가쁜 벽련암 쪽에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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