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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덕의 길·8
본문
인생을 흔히 길에 비유한다. 한평생 살아가는 일이 먼 길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리라. 그 길이 평생 탄탄대로 아니고 날마다 꽃길 아니다. 고개를 넘으면 강이 또 앞을 막는다. 오르막 내리막, 자갈길 진창길 터덜터덜 지치고 힘이 든다. 돌이켜 보면 길은 항상 신기루 희망 고문이었다. 어둑어둑한 길에 꽃 한 송이가 위안이 되는 날이 있다.
사람들 옆에는 항상 꽃이 있다. 사람들은 항상 꽃을 생각한다. 꽃처럼 살고 싶다는 뜻이리라. 가는 길이 향기롭고 싶다는 의미겠다. 먼 길에 고단한 몸, 꽃처럼 환하게 웃고 싶지 않은 이 있으랴. 봄이면 천지 간에 봄꽃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여름꽃 가을이면 가을꽃이 지천이다. 유별났던 지난겨울에도 겨울꽃은 또 제자리에 피었을 것이다. 어두운 사람을 밝혔을 것이다.

1 선운사 일주문

2 동백숲
전라북도 고창에 선운사(禪雲寺)가 있다. 아산면 도솔산 선운사,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중창되었다. 인근에 검단리(檢旦里)가 있으며, 검단선사가 인근 바닷가 사람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쳤다는 설로 보아 검단선사 창건설이 설득력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다.

3 선운사 동구 송악

4 동구 고인돌

5 동구 솔숲
동백(冬柏), 겨울 冬 자가 들어있는 꽃이다. 11월 말부터 2, 3월까지 외롭게 붉다. 향기 없는 대신 꿀을 많이 머금고 동박새를 유혹한다. 향기 못 맡는 동박새 때문에 향기가 없는지, 향기가 없어 동박새 후각이 퇴화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초목이 시든 시절 푸른 잎에 붉게 피어, 사랑을 잃고 각혈하듯 모가지째 떨군다. 동백은 예로부터 붉게 예술을 꽃피워왔다.

6 대웅전 뒤편 동백(2024)
3월 말에 피어 4월 말까지 붉은 선운사 동백은 다른 데보다 늦어 춘백(春柏)이라고도 한다. 봄, 여름, 가을에 못 피고 겨울에 피어나는 꽃, 아니 그 겨울도 아니고 봄 다되어 피어나는 서글픈 꽃이 선운사 춘백이다. 열매로 기름을 짜기도 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넘긴 할머니의 낭자머리에 바르기도 했다. 줄 맞춰 엎드려 교실 바닥을 반짝반짝 윤내던 시절도 있었다. 대웅전 뒤 5천여 평에 3천여 그루, 행여 닥칠 산불을 막고 있다.

7 부도비

8 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
절 입구 부도, 탑비 중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가 있다. 절 아래 동구에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선운사 洞口’ 시비(詩碑)가 서 있었다. 말석에 겨우 엉덩이 걸치고 있지만 나도 명색 시인 아니던가. 한잔 낮술로 목이나 축였을 뿐인데 오르며 시비를 놓쳤다. 내려오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인근 푸드트럭 주인에게 물었다. “없어졌어요”, 퉁명스런 답이 오고 “누가? 언제요?” 되물어도 묵묵부답이다. 태인 피향정의 목 떨어져 나간 조 아무개의 비석이 생각났다. 친일 행적에 들어내 버렸다는 전주 덕진 공원의 아무개, 아무개의 시비가 어른거렸다.

9 사라진 ‘선운사 동구’ 시비

10 선운산가비
미당이 읊고 최영미가 따라 읊고 송창식이 노래한 선운사 동백이 보고 싶었었다. 지난 토요일 선운사에 다녀왔다. 유별났던 지난겨울 탓일까? 마음 시려 동백꽃이나 보러 갔었다. 대웅전을 돌아드는 어둑한 눈에 붉은 점 몇 맺혔을 뿐이었다. 아직 불씨만 같던 그 꽃망울을 후- 후- 며칠 봄바람이 불어대면 확, 살아날 것만 같았다. 올해도 때를 못 맞췄다. 동백이 늦은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급한 거겠다. 하긴 한평생 걸음 맞아떨어진 적 몇 번이나 될까? 어디 활짝 피어야만 꽃일까? 붉은 마음 이미 꽃이겠다. 그러니 내 헛걸음도 아주 허탕은 아니었겠다.

11 동백꽃망울

12 두 번째 붉은 동백(2024)

13 땅 위에 핀 동백(2024)
동백은 세 번 핀다. 나무에 붉고, 땅 위에 붉고, 마음에 붉다. 아직 꽃 안 켠 선운사가 오랜 기억인 듯 어둑했다. 도솔산 낙조가 유난히 붉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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